
연중기획-새로운 리스크, 새로운 규제 ⑥ 높아지는 통상 장벽, 수출기업 생존무기 된 ‘PL·무역보험’

연중기획-새로운 리스크, 새로운 규제 ⑥ 높아지는 통상 장벽, 수출기업 생존무기 된 ‘PL·무역보험’

연중기획-새로운 리스크, 새로운 규제 ⑥ 높아지는 통상 장벽, 수출기업 생존무기 된 ‘PL·무역보험’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수출기업을 둘러싼 규제와 위험의 범위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EU에서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올해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 데 이어 제조물책임관련 법제도 약 40년 만에 개편됐다.
강제노동과 인권, 공급망의 환경·사회적 위험까지 관리 대상으로 들어오면서 제품을 생산해 해외에 판매하는 과정 자체에 대한 부담도 커지고 있다. 미국 역시 강제노동 문제를 통상정책과 연계하면서 인권 이슈가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중동발 지정학적 불안으로 해상 운송과 수출대금 회수 위험까지 겹쳤다. 제품 결함에 따른 법적 책임은 ‘제조물배상책임보험(PL보험)’으로, 수출대금 미회수 등 거래 위험은 ‘무역보험’으로 대응하는 등 위험관리도 세분화되고 있다.
■ PL보험, 제품 결함 따른 ‘배상책임’ 보장
PL보험은 기업이 제조·판매·공급한 제품의 결함으로 소비자나 거래처 등 제3자에게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이 부담하는 법률상 손해배상책임을 보장하는 보험이다.
예를 들어 국내 자동차부품 업체가 유럽에 부품을 수출한 뒤 결함으로 차량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소비자가 다쳤다면 제조사에 배상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 PL보험은 약관에 따라 손해배상금과 사고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등을 보장한다.
가입은 기업의 필요에 따라 이뤄지는 임의보험 형태가 기본이다. 국내에서는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의 보험료 부담을 낮추기 위한 PL단체보험을 운영하고 있으며, 삼성화재를 주간사로 한화손보·DB손해보험·롯데손해보험·흥국화재·메리츠화재가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제품에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AI)이 결합되면서 기존 PL보험이 전제로 했던 위험과 기업이 실제 부담할 책임 사이의 간극도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 EU 제조물책임 개편, 소프트웨어·AI도 책임 영역
대표적인 사례가 EU의 새로운 제조물책임지침(Product Liability Directive, PLD)이다.
EU는 2024년 기존 지침을 전면 개편했다. 1985년 지침을 대체하는 새 지침은 2024년 12월 8일 발효됐으며, EU 회원국은 2026년 12월 9일까지 국내법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정 지침은 12월 9일 이후 시장에 출시되거나 사용이 개시되는 제품에 적용된다.
개정의 핵심은 디지털 기술을 제조물책임 체계에 반영한 것이다. 소프트웨어가 제조물 범위에 포함되고 AI 시스템을 포함한 소프트웨어도 제조물책임 체계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제조사의 통제 아래 이뤄지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업그레이드 과정의 결함도 책임 판단과 연결될 수 있다. 제품의 연결성, 지속적인 학습 기능, 사이버보안 등도 결함 여부를 판단할 때 고려된다.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는 규정도 마련됐다.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결함이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으며, 손해배상청구권의 장기 소멸 기간은 원칙적으로 10년이지만 잠복성 신체손상의 경우 최대 25년까지 연장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수출기업도 물리적 제품 결함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기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책임까지 관리해야 한다.
■ 법적 책임 확대에 ‘담보 공백’ 우려
보험업계가 PLD 개정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률상 책임 범위가 확대된다고 기존 PL보험의 담보 범위까지 자동으로 넓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EU 법령 개정으로 기존 PL보험에서 보장하는 담보 영역에 일부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현재 영국의 로이즈(Lloyd’s) 등 보험시장에서는 법령 개정에 맞춰 보험의 담보 범위를 확장하거나 조정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며 “당사에서도 담보 공백이 없도록 상품을 개정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담보 공백은 법률상 기업이 책임을 부담할 가능성은 있지만 기존 보험약관에서는 해당 위험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을 뜻한다. 예컨대 제품에 탑재된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안전사고가 발생했다면 기업의 책임이 문제될 수 있지만, 기존 PL보험에서 해당 위험을 어디까지 제품 결함으로 인정할지는 별도 검토가 필요하다.
소프트웨어 오류나 사이버보안 취약점처럼 전통적인 제품 결함과 다른 위험은 PL보험과 사이버보험 등 다른 보험상품과의 경계도 중요해질 수 있다. 수출기업 역시 유럽 시장에서 부담할 책임과 현재 가입한 보험의 보장 내용을 점검해야 한다.
■ 탄소·인권·강제노동까지… 수출기업 공급망 관리 ‘비상’
수출기업이 관리해야 할 위험은 제품책임에 그치지 않는다.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를 얼마나 배출했는지, 공급망에서 인권 침해나 강제노동이 발생하지 않았는지까지 규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CBAM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전환기간을 거쳐 올해 1월 1일부터 확정기간에 들어갔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등 대상 품목을 EU로 수입하는 경우 EU 수입자 또는 간접통관대리인이 내재배출량을 신고한다. 국내 수출기업도 관련 배출량을 산정하고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해졌다.
인권 문제도 별도 규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EU는 2024년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제품의 EU 시장 출시·유통과 EU 역외 수출을 금지하는 규정을 채택했으며, 2027년 12월 14일부터 적용된다. 공급망 어느 단계에서든 강제노동이 이뤄진 제품의 EU 시장 출시·유통을 금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EU는 공급망의 인권·환경 위험 관리도 강화하고 있다.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을 통해 기업의 자체 사업뿐 아니라 자회사와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환경 위험까지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2026년 개정으로 적용 대상은 축소됐지만, 국내 기업도 EU 대기업의 공급망에 포함될 경우 관련 정보 제공이나 관리 요구를 받을 수 있다.
결국 EU 시장에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은 탄소배출량뿐 아니라 생산 과정의 인권·환경 문제와 공급망까지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EU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2026년 3월 한국을 포함한 60개 경제를 대상으로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제품의 수입을 막기 위한 각국의 제도와 집행 수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USTR은 각 경제의 강제노동 제품 수입 금지 제도가 미국의 통상에 부담을 주는지 등을 조사했다.
이어 7월에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최종 조치를 발표했다.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의 특정 제품에는 최혜국(MFN) 관세와 무역법 제301조(Section 301)에 따른 관세의 합계가 10% 또는 12.5%가 되도록 하는 조치가 적용될 수 있도록 했다.
강제노동 문제가 단순한 인권 이슈를 넘어 실제 통상 비용과 수출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전환되고 있다. 국내 수출기업의 공급망 관리 부담도 커지는 이유다.
■ 중동발 물류 불안… 수출대금 회수 위험도 커져
여기에 지정학적 위험까지 더해지면서 수출기업의 금융·물류 리스크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무역보험공사(무보)는 지난 3월 이란 사태와 중동 분쟁 확산에 대응해 비상대책 TF를 가동하고, 호르무즈 해협 인근 7개국과 이스라엘 등에 수출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피해 접수와 긴급 자금 공급, 정책 지원 등을 추진했다. 무보가 접수한 수출 애로에는 계약 취소, 물류 정체, 수출대금 지연 등이 포함됐다.
중동발 지정학적 불안으로 해외 거래 위험이 커지면서 무역보험의 역할도 부각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무보가 무역보험을 운영하며 수출대금 미회수 등 해외 거래 위험을 보완한다.
PL보험이 제품 결함에 따른 법률상 배상책임을 보장한다면, 무역보험은 수출 과정의 거래 위험을 보완하는 구조다.
실제로 무보와 서울시는 지난 6월 서울 소재 전년도 수출실적 500만달러 이하 중소기업 약 2만1000곳을 대상으로 수출대금 미회수 위험을 보장하는 단체보험을 지원했다. 수출 후 바이어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하면 기업당 최대 5만달러까지 보상한다.
수출기업 역시 위험에 따라 보험을 나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제품 결함에 따른 제3자 손해는 PL보험으로, 운송 과정의 물적 손해는 적하보험 등으로, 해외 거래처의 신용위험으로 인한 대금 미지급은 수출신용보험 등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 복잡해진 수출환경, 보험도 ‘위험별 세분화’
수출기업이 부담하는 위험은 이제 제품 결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품에 적용되는 법적 책임부터 생산 과정의 탄소·인권 문제, 공급망 관리, 해외 거래처의 대금 회수와 운송 차질까지 사업 과정 곳곳에서 새로운 위험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보험이 맡는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PL보험은 제조물 결함에 따른 배상책임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와 AI가 결합된 제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책임 위험까지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무역보험은 해외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출대금 미회수 위험을 보완하며, 지정학적 불안으로 수출 차질이 커질수록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적하보험 등 다른 보험상품 역시 운송 과정의 물적 손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수출기업의 보험 수요 역시 제품책임에 국한되지 않고 운송과 대금 회수 등 해외 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 넓어지고 있다. 통상·환경·인권 규제와 공급망 관리, 지정학적 불안이 동시에 이어지는 만큼 각 위험의 성격에 맞는 보험을 활용하는 흐름도 점차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