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보험재단, “자살, 개인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
국내 자살 문제가 개인의 심리 상태를 넘어 사회 구조와 정책 체계 전반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하 재단)은 최근 ‘제1차 자살예방 라운드테이블 결과 보고서’를 발간하고, 한국 사회 자살 문제를 둘러싼 구조적 원인과 대응 과제를 정리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의료, 심리, 사회 분야 전문가 12명이 참여한 지난 1월 28일 자살예방 라운드테이블 논의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재단은 자살을 단순한 개인 위기나 정신건강 문제로만 좁혀 볼 경우 현실적인 해법 마련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사회 전반의 환경과 제도 작동 방식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보고서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가 여러 사회구조적 요인이 중첩된 결과라고 진단했다. 경쟁의 심화와 양극화, 공동체 약화, 사회적 고립이 누적되며 개인 삶의 안전망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살예방 정책 역시 단기 처방 위주로 운영되고, 부처별 데이터가 흩어져 있으며, 지역마다 실행 역량 차이가 큰 점이 한계로 지목됐다.
재단이 소개한 보고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3불 사회’다. 불신, 불안, 불만이 쌓인 사회 분위기가 삶의 안전성을 떨어뜨리고, 자살 위험을 높이는 토양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보고서는 한국 사회의 자살을 우울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도 진단했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울분처럼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되는 정서 역시 주요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짚었다.
해법으로는 여러 분야가 함께 참여하는 입체적 접근이 제시됐다. 파편화된 공공데이터를 연계해 자살 위험 요인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실제 효과를 검증할 수 있는 사회적 실험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초‧중‧고 행복교육 강화, 자살유족 지원 확대, 생명경시 문화 개선, 회복탄력성 연구 강화, 지자체 담당 인력의 전문성 제고, 민간단체 참여 활성화 등도 제안에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 점검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생명보험재단 자살예방 라운드테이블 공동의장인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사회 시스템의 고장을 보여주는 ‘사회적 부검 리포트’와 같다”며 “개인의 병리적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정책 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최근 통계 흐름과도 맞닿는다. 지난 5일 국가데이터처에서 발표한 ‘국민 삶의 질 2025’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9.1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27.3명보다 오른 수치로,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연령대별로는 40대, 50대, 30대에서 증가 폭이 두드러졌고, 삶의 만족도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낮은 수준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생명보험재단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식 속에서 위기 개입과 예방을 아우르기 위해 보고서 발간에 그치지 않고 현장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한강 교량 위기 대응 사업인 ‘SOS 생명의전화’, 청소년 대상 SNS 자살상담 프로그램 ‘다 들어줄 개’와 ‘마들랜’, 자살시도자 응급의료비 지원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채널 ‘생보사(생명을 보듬는 사람들)’를 통해 ‘SOS 고민택시’ 시리즈를 선보이며 청년층의 취업, 직장, 관계, 주거 불안 문제를 주제로 생명존중 메시지 확산에도 나서고 있다.
이장우 생명보험재단 이사장은 “자살은 더 이상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정부와 학계, 현장을 잇는 민간 플랫폼으로서 정책 논의와 현장 사업을 연결하고 실효성 있는 예방 모델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재단은 내달 29일 제2차 자살예방 라운드테이블을 열고, 청소년 자살 문제와 대응 방안을 중심으로 추가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