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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희의 금융경제 이야기] 아프기 전, 내 돈 쓰는 법부터 정해두자

최학희 대표
최학희 대표
ⓒMagni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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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날이 온다. 내가 아픈 날이다.

혼자 사는 50대 중반 여성 두 명이 차례로 병을 앓았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이들은 가까운 지인에게 계좌와 카드 정보를 맡겼다. 지인이 겪은 이야기다. 평소 자기 일을 야무지게 챙기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몸이 아프면서 돈 하나 내 손으로 다루기 어려워졌다. 노후 준비는 돈을 모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아플 때 그 돈을 누가, 어떻게 쓸지 정해두는 데까지 가야 한다.

부모가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으면 40·50대 자녀는 일정표부터 바뀐다. 병원에 동행하고, 병원비를 내고, 보험금을 청구한다. 집에 남은 각종 요금과 생활비도 챙겨야 한다. 직장과 자녀 돌봄 사이에 이 일까지 끼워 넣다 보면 자기 시간과 휴식은 뒤로 밀린다. 누가 무엇을 맡을지 정해두지 않으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한 사람에게 일이 몰린다. 부모 돈을 챙길 준비는 결국 내 일상을 지키는 준비다.

초고령사회에서 40대 이상 세대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부모를 부양하면서 자기 노후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노후 자금은 잔액과 수익률만으로 따질 수 없다. 생활비를 마련했다면, 내가 직접 돈을 다루기 어려울 때 그 돈이 어떻게 쓰일지도 미리 정해둬야 한다. 아픈 뒤에 서두르면 본인도 가족도 급한 일에 쫓겨 차분히 의논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화는 건강할 때 시작해야 한다. 돈이 있어도 길을 모르면 가족은 헤맨다.

몇 주 동안 외출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보자. 관리비와 보험료가 빠져나가는 계좌에 잔액은 충분한가. 갑자기 생긴 병원비는 어느 돈으로 낼 것인가. 보험금 청구는 어디에 물어볼 것인가. 이 세 가지만 정리해 도와줄 사람과 나눠보자. 출발로는 충분하다. 재산을 모두 공개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도움만큼만 알려주면 된다. 가족이 같은 일을 거듭 확인하거나 급한 마음에 자기 돈부터 보태는 일도 그만큼 준다.

보험은 아플 때 쓰려고 든다. 그렇다면 보험 상담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를 보장하는지 설명했다면, 고객이 아플 때 그 보험을 실제로 쓸 수 있는지도 묻자. 문의처와 청구 방법을 아는지, 혼자 처리하기 어려울 때 누가 도울 수 있는지 함께 점검하자. 가입할 때의 설명과 아플 때의 청구 사이에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을 잇는 게 상담의 역할이다.

도움을 부탁할 때는 절차도 갖춰야 한다. 통장과 비밀번호를 건넨다고 모든 금융 업무를 대신할 수 있지 않다. 대리 거래에 필요한 서류와 절차는 거래 종류와 금융회사마다 다르다. 외출만 어려운 경우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준비 방법이 다를 수 있다. 원하는 도움 범위를 먼저 정하고, 거래하는 금융회사에 미리 확인해 두자. 맡기는 사람과 돕는 사람을 함께 지키는 준비다.

그 연장선에서 신탁을 살펴볼 수 있다. 신탁은 재산을 맡은 사람이나 기관이 미리 정한 목적과 방식대로 재산을 관리하고 쓰는 제도다. 살아 있는 동안 내 생활을 위해 돈을 어떻게 쓸지 정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활비는 매달 지급하고, 병원비는 증빙을 확인한 뒤 따로 지급하는 방식을 정할 수 있다. 급한 비용은 어떻게 처리할지, 관리 명세는 누가 확인할지도 명확히 하자. 맡길 수 있는 재산과 지급 조건, 수수료는 계약마다 다르다. 필요한 도움과 감당할 비용을 함께 따져보고, 생활이 바뀌면 계획도 다시 점검하자.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돈의 주인인 ‘본인의 뜻’이 있어야 한다. 자녀에게 편한 방식이 부모에게도 좋다고 단정할 수 없다. 부모가 어떤 돌봄을 원하고 무엇에 돈을 쓰고 싶은지부터 듣자. 서류를 돕는 일과 삶을 대신 결정하는 일은 다르다. 금융 업무가 어렵다는 이유로 본인이 내릴 수 있는 결정까지 가져와서는 안 된다.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과 본인 뜻대로 쓰도록 돕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재산이 적은 사람에게도 이 준비는 절실하다. 넉넉지 않은 연금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며칠 치 생활비를 제때 못 쓰는 것도 큰 타격이다. 가족 도움을 받기 어렵다면 공적 돌봄과 복지 지원을 알아보자. 돈 관리를 도와줄 사람도 찾아야 한다. 재산 규모만으로 상담이 필요한지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살피는 금융이 생활의 빈틈을 메운다.

이번 주말, 부모님이나 나를 도와줄 사람과 종이 한 장을 펴보자. 생활비가 나가는 곳, 의료비로 쓸 돈이 있는 곳, 보험 문의처, 도움을 청할 사람. 이 네 칸부터 채워보자. 비밀번호를 공유하자는 말이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 무엇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 알 수 있게 하자. 부모님을 돕다 발견한 ‘빈틈’은 내 노후 계획에도 옮겨 적자. 부모의 오늘을 돕는 준비가 내 노후의 기준이 된다.

최학희

시니어라이프비즈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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