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7일은 ‘금융의 날’이다. 1964년 ‘저축의 날’로 출발한 이 기념일이 2016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금융 환경 변화와 함께 저축과 재산 형성에 머물던 금융정책의 방향이 투자와 혁신, 포용금융 등으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사이 서민금융은 정책기관만의 몫이 아닌 금융권 전체의 사회적 책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의 금융정책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지난 10년간 정책서민금융 공급 규모는 6조원 수준에서 11조원대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제도를 고치고 재원을 확충하며 민간 금융회사의 참여를 통해 문턱을 낮춰온 결과다. 그러나 공급을 늘렸다고 정책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금융으로 위기를 넘겼는지, 채무조정을 거쳐 경제활동에 복귀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공급의 양이 늘어난 만큼 이제는 그 지원이 남긴 변화에도 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금융이 왜 삶의 변화까지 살펴야 할까. 최근 읽은 최태현 교수의 ‘이타주의자 선언’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저자는 이타심을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겹치는 영역을 알아채고 신경 쓰는 마음’으로 설명한다. 이타심은 나를 희생하는 데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어려움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된다.
금융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족의 삶과 주변의 일상, 지역사회로 번진다. 예컨대 생계비 100만~200만원을 구하지 못해 불법사금융에 손을 댄 누군가의 빚은 불어나는 이자와 추심 속에서 가족 전체의 생활도 흔든다. 반대로 제때 안전한 금융을 만나 생활비를 마련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가족의 일상은 물론 우리 사회의 활력도 함께 살아난다.
누군가의 위기를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금융이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금융이 되는 이유다. 금융의 역할은 개인의 필요를 채우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인과 사회가 함께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까지 넓어져야 한다.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가 추진 중인 금융기본권, 곧 누구나 필요한 금융을 이용하며 경제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권리도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경제적 격차가 금융 접근성의 격차로 이어지고, 다시 자산과 기회의 격차를 키우는 시대에 금융기본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지 금융의 포용성을 높이는 일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이 불평등의 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는 기초상담을 통해 고객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데이터를 활용해 미처 말하지 못한 어려움까지 먼저 살피고자 한다. 나아가 위기에 처한 국민이 다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도록 채무조정과 보험, 대출, 저축에 이르는 기초적인 금융을 누구나 누리게 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서민금융의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그동안 정책서민금융은 공급규모와 대위변제율 등 실적을 중심으로 평가받아 왔지만 이제는 지원 이후의 변화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빌려준 돈이 얼마나 회수됐는지 못지않게 그 돈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개선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기관은 정책서민금융과 자산형성 지원, 금융교육의 사회적 편익과 파급효과를 학계와 함께 분석하고, 채무조정과 복합지원이 신용 회복과 경제적 재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도 개발하고 있다. 그 목적은 단순히 실적을 평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필요한 사람에게 더 적절한 정책을 향하게 하는 데 있다.
금융기본권은 두 개의 문으로 완성된다. 제도권 금융으로 들어오는 입구, 그리고 빚에 갇히지 않고 더 나은 삶으로 올라서는 출구다. 입구만 넓히면 빚만 쌓인다. 출구가 함께 열려야 금융은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금융, 경제적 어려움이 삶의 격차로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금융. 그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금융의 모습일 것이다.
김은경
서민금융진흥원 원장 겸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