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20년 경력의 패션 전문 카피라이터야.”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크리에이티브 수업에서는 이런 식으로 역할을 부여한다. 까다로운 소비자가 되어보라고도 하고, 냉정한 심사위원의 눈으로 평가하라고도 한다. 같은 질문이라도 어떤 역할을 맡기느냐에 따라 답변의 방향과 말투가 달라진다.
학생들에게 그 차이를 설명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강의가 끝나면 이 역할을 얼마나 잘 내려놓고 있는가. 아내가 기다린 것도 그저 “그랬구나”라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문제점을 짚고 대안을 설명했다. 돌아온 것은 핀잔뿐. 그 아픈 기억도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강의실을 나왔는데 강의는 끝나지 않은 셈이다. 역할은 우리를 유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유능함이 자리를 잘못 찾으면 누군가에게는 피곤한 참견이 되기도 한다.
갓 팀장이 된 사람을 떠올려 보자. 지난달까지 동료들과 상사의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그가 이제는 점심 메뉴를 정하는 자리에서도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 “오늘은 국수가 당기네”라고 말하면 “오후 일정 생각하면 가까운 데가 낫겠어”라고 정리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누군가는 계속 팀원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팀장이 된 사람 역시 편하지만은 않다. 전에는 쉽게 물어보던 일을 이제는 혼자 고민한다. 팀장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말을 들을까 봐서다. 권한이 생겼는데 모른다고 말할 자유는 줄었다.
주니어급 직원도 다르지 않다. 입사 초부터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왔다면 또 다른 어려운 업무를 맡았을 때 선뜻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밤늦게까지 혼자 붙들고 있다가 일이 한참 늦어지고서야 뒤늦게 묻는다. “진작 물어보지” 답답하다는 듯 선배는 말한다. 본인도 그러고 싶었다. 다만 유능한 사람이라는 얼굴에 흠집이 생길까 두려웠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잘 안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켜온 얼굴을 어느새 나 자신이라고 믿게 된다. 칼 융(Carl Gustav Jung)의 페르소나(Persona) 개념은 바로 이 지점을 돌아보게 한다.
페르소나는 고대 로마의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면은 관객에게 배역을 알려줬지만, 왕의 가면을 쓴 배우가 실제 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가면은 필요하다.
의사는 환자의 불안을 견뎌야 하고, 교사는 학생 앞에서 책임 있게 말해야 한다. 마음이 어수선하다고 매번 있는 그대로 쏟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가면은 죄가 없다. 가면 덕분에 우리는 책임을 배우고, 아직 부족한 자신을 조금 더 믿음직한 사람으로 훈련하기도 한다. 문제는 공연이 끝났는데도 같은 배역을 계속 연기할 때 생긴다.
회사에서 수십, 수백명을 지휘하던 사람이 집에서도 가족의 의견을 보고사항처럼 듣는다면, 식탁은 또 하나의 회의실이 된다. 은퇴한 사람이 지인에게 고문 자리라도 하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마음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보수는 없어도 괜찮다며 “명함은 있어야 사람을 만나지”라고 덧붙인다. 그에게 직함은 권위이면서 자신을 설명하는 익숙한 언어였을 터이다. 그 몇 글자가 사라지자 이름만으로는 소개가 끝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그를 허영에 찬 사람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그는 그 호칭을 오래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단된 상황과 맞닥뜨렸을 뿐이다.
역할에 붙잡히는 일은 은퇴 뒤에만 생기지 않는다. 늘 좋은 사람으로 통하던 이가 사소한 부탁에 화를 내면 주변은 당황한다. “지난번에는 흔쾌히 해주었잖아.” 하지만 당시에도 흔쾌하지 않았을 수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얼굴을 지키느라 싫다는 말을 삼켰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가면이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이라지 않는가. 남에게 갑자기 비친 얼굴이 정작 자신에게도 낯설다. 칼 융이 말한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인정받는 얼굴 뒤로 밀어둔 마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남아 있기도 한다.
그 뒤편에 분노나 질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빈틈없는 사람으로 사느라 장난기를 접어두었을 수도 있고,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느라 서툰 취미에 빠지는 즐거움을 미뤘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드럼에 입문하며 낯선 내 모습을 만났다. 손과 발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나보다 훨씬 어린 드러머에게 같은 지적을 수없이 듣는다. 가르치던 내가 배우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역할을 잘 수행하는 능력만큼, 자리가 달라졌을 때 그 역할을 내려놓는 능력도 중요하다. 다음 수업에서도 나는 학생들에게 AI의 역할을 정해주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강의실을 나설 때는 한 번쯤 돌아볼 생각이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내가 익숙하게 건네는 설명인지, 그가 기다리는 위로인지. 가면은 죄가 없다.
박치수
청주대학교 교수 | 前 교보생명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