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범의 60+Life story 병이 아니라 ‘생활의 붕괴’가 노후를 무너뜨린다
노후를 무너뜨리는 건 병명 자체가 아니다. 그 병 때문에 평범했던 하루를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되는 순간이다.
위험에는 세 가지 비밀이 있다. 어떤 위험이 올지 모르고, 언제 닥칠지 모르며, 그때 가계 형편이 어떨지도 모른다. 이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것은 위험이 어떤 이름으로 찾아올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보험은 약관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한다. 실손의료보험으로 실제 부담한 의료비를 보완하고, 암·뇌·심장질환 진단비와 질병·상해 수술비, 입원일당으로 치료 과정의 지출에 대비한다. 사망보험금은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 남은 가족의 생활비와 부채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각각 쓰임은 다르지만, 큰 위험이 노후자산과 가족의 생활을 한꺼번에 흔들지 않도록 막는 기본 방어선이다. 그러나 이런 보장을 갖췄다고 위험에 대한 준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병이 생길지 모르는 데다, 치료가 끝난 뒤 몸에 어떤 변화가 남을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노후의 일상은 암이나 뇌·심장질환으로만 흔들리지 않는다. 낙상으로 골절돼 오래 걷지 못할 수 있고, 치매나 파킨슨병으로 치료비보다 간병비가 더 많이 들 수도 있다. 중증질환은 아니어도 혼자 밥을 먹고 씻고 움직이는 일이 어려워질 수 있다.
보험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의 위험이지만 생활에 남기는 결과는 닮아 있다. 배우자가 돌봄을 맡고, 자녀가 병원에 동행한다. 의료비 외에 간병비와 교통비, 식사비가 계속 들고, 몸 상태에 따라 살던 집을 손봐야 할 수도 있다. 가족 중 누군가는 일을 줄이거나 멈춰야 한다.
같은 병을 앓아도 부담은 다르다. 치료 뒤 곧바로 일상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유증과 재활이 오래 이어지는 사람도 있다. 돌봐줄 가족이 있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이 감당해야 할 비용도 같지 않다.
결국 노후생활이 흔들리는 정도는 병명보다 치료 이후의 몸 상태와 돌봄 기간에 달려 있다.
보험을 점검할 때도 “무슨 병에 얼마가 나오는가”에서 멈추면 안 된다. 그 위험이 닥쳤을 때 치료비와 생활비, 소득과 가족의 일상 가운데 무엇이 먼저 흔들릴지를 함께 봐야 한다. 가령 돌봄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면 누가 맡을지, 집에서 감당할 수 있을지 시설을 이용해야 할지, 그 비용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위험이 닥쳤을 때의 가계 형편도 중요하다. 금융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병이 생길 수 있고, 은퇴자금을 상당 부분 사용한 뒤 간병이 시작될 수도 있다.
같은 3000만원이 필요해도 현금이 충분한 집과 생활비가 빠듯한 집이 받는 충격은 다르다. 지출 기간과 몸의 상태, 돌봐줄 사람, 바로 쓸 수 있는 현금에 따라 한 번의 질병이 노후 전체를 흔드는 위험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과 사고를 보험으로 준비할 수는 없다. 질병마다 특약을 붙이면 보험료 부담이 커지고, 보장 항목이 많다고 예상하지 못한 위험까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보험과 비상자금, 연금이 맡을 몫을 나눠야 한다.
실손의료보험은 실제 의료비를 보완하고, 진단비와 수술비, 입원일당은 치료 과정에서 필요한 목돈과 지출을 메운다. 사망보험금은 남은 가족의 생활을 지키는 자금이다. 혼자 생활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장해와 간병, 돌봄 비용을 따로 살펴야 한다. 보험금 지급 조건에 맞지 않거나 지급이 늦어질 때를 견딜 비상자금과 연금소득도 필요하다.
특히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세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ㆍ 큰 치료비가 생겼을 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가.
ㆍ 혼자 지내기 어려워졌을 때 간병과 돌봄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ㆍ 보험금이 나오지 않거나 지급이 늦어져도 생활비를 이어갈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보험의 개수가 아니다. 큰 치료비와 긴 돌봄, 생활비 공백은 어느 하나만 발생해도 노후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험은 정해진 위험과 조건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하지만, 노후 준비는 보험금이 나오지 않는 경우와 보험금이 나와도 생활이 회복되지 않는 경우까지 살피는 일이다.
물론 어떤 위험이 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보험과 비상자금, 연금이 맡을 몫을 미리 나눠두면 완벽하게 대비할 수는 없어도, 예상하지 못한 위험 때문에 노후생활 전체가 무너지는 일은 막을 수 있다.
이종범
제3의 나이 연구소 | 금융노년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