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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금형 퇴직연금, 보험회사에게는 위기가 아닌 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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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금형 퇴직연금, 보험회사에게는 위기가 아닌 마지막 기회!

500조원. 2025년 말 기준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다. 퇴직연금은 단순한 금융상품을 넘어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거대한 장기자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OECD 주요국은 퇴직연금 시장을 GDP를 웃도는 규모로 성장시켜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자본시장 인프라로 활용하고 있다.

문제는 성장의 속도가 아니라 질이다. 2025년 주식시장 상승에 힘입어 퇴직연금 수익률은 약 6.5%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지만, 수십 년을 운용하는 노후자산 특성상 단기 성과보다 장기 수익률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최근 10년 연평균 수익률은 2.64%에 불과해 국민의 노후자산을 책임지는 제도라고 보기에는 참으로 민망한 형국이다. 전체 적립금의 75% 이상이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단순한 상품 다양화나 투자 교육만으로 해결하긴 어렵다. 근본 원인은 상품이 아닌 제도에 있다. 가입자 개인에게 복잡한 투자 결정을 맡기는 계약형 구조에서는 단기적인 원금보전 성향이 반복되기 쉬우며, 성과를 높이려면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

최근 노사정이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 및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를 공동 선언하며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기금형은 상품을 바꾸는 제도가 아닌, 거버넌스를 재설계하는 제도다. 계약형이 가입자·기업 중심의 ‘개별 계약·자체 관리’ 방식이라면, 기금형은 독립된 기금이 자산을 모아 운용하는 ‘지배구조 중심의 집합 운용’ 방식이다.

기금의 수탁자는 가입자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수탁자 충실의무(Fiduciary Duty)를 부담한다. 즉 기금형의 경쟁력은 특정 상품이 아니라 전문성, 독립성, 책임성을 갖춘 거버넌스에서 나온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경제 개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영향력 감소를 보완하려는 수단이라 비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기금형이 필요한 이유다. 국민연금이 고령화로 순유출 시기에 진입하면, 우리 경제에 장기 투자자금을 지속해서 공급할 새로운 기관투자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금형이 정착되면 근로자는 본업에 집중하고 자산은 전문가가 운용하게 된다. 축적된 자금은 기업의 혁신과 생산적 투자에 공급되고, 기업의 성장은 다시 근로자의 연금자산 증가로 이어진다. 이것이 연금 선진국들이 구축한 ‘연금자본주의(Pension Capitalism)’의 핵심이다.

보험회사에게 기금형 퇴직연금은 위기가 아니라 마지막 기회다. 현재 계약형 시장에서 보험회사는 구조적 열세다. 은행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증권사는 수익률을 앞세워 확장 중이다. 지금의 보험회사는 침몰이 시작된 타이타닉과 닮아 있다. 덩치가 워낙 커 아직 위기를 실감하지 못할 뿐 시장의 흐름은 이미 변했다.

기금형은 이 흐름을 뒤집을 유일한 기회다. 주요 투자수단으로 예상되는 TDF(Target Date Fund)는 가입자의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배분을 자동으로 조정한다. 현재 계약형 퇴직연금에서 사전지정운용제도에 편입된 TDF의 성과를 보면 보험·은행·증권 간 수익률 차이는 15% 내외로 크지 않다. 계약형 시대의 경쟁력이 '판매채널'이었다면, 기금형 시대의 경쟁력은 '장기 운용역량과 위험관리, 거버넌스'다. 보험회사가 경쟁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증권사가 아니다. 변화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다.

정부는 기금형 도입과 함께 ‘똑똑한 디폴트옵션(Smart Default Option)’을 결합해야 한다. 연금 선진국의 성공은 국민이 뛰어난 투자자여서가 아니다. 근로자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합리적인 장기투자로 연결되도록 기본값을 잘 설계했기 때문이다.

호주는 디폴트옵션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의무 기여율을 1992년 3%에서 2025년 12%까지 높였다. 미국은 디폴트옵션을 중심으로 계약형 퇴직연금을 개혁해 수많은 ‘평범한 백만장자’를 만들어 냈고,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2025년부터는 기여율을 단계적으로 15% 수준까지 높이는 자동가입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연금 선진국들이 퇴직연금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제도가 성공하면 정부의 노후복지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장기자금을 자본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해 기업의 혁신과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도의 도입 여부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기금형 퇴직연금을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다.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다음 20년은 바로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대환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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