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 구구팔팔 백두산
등산 동호인의 회식에서 빠지지 않는 건배사가 있다. '구구팔팔 백두산'이다. '아흔아홉살까지 팔팔하게 살아 백세에도 두 발로 산에 가자'는 뜻으로, 잔을 들고 건배하는 등산인 대부분 자신은 '구구팔팔 백두산'을 하게 될 것으로 자신한다. 하지만 예순을 넘기고 은퇴기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은 점점 따로 놀게 된다. 몸이 마음 먹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다. '만만보 산책'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하루 일만보 걷기는 운동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산책이었는데 갈수록 힘에 부친다는 것을 절감한다.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라는 '노랫가락 차차차'의 노랫말은 결코 허튼말이 아니다.
요즘 내 또래의 부모상 조문을 가면 고인의 연세가 대부분 구십이 넘는다. 평균수명 84세, 최빈 사망연령 92세라는 통계와 얼추 비슷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칠순을 넘기면 팔순도 가볍게 넘고 구십세 이상 생존하는 것 같다. 관건은 육십대다. 최근 몇 년 동안 조문 상황을 돌아보니 본인상이 의외로 많다. 정년을 채운 뒤 현직에서 물러나 여유있는 노후를 맞게 될 것으로 보였던 지인 가운데 은퇴 직후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본인상 부고를 전해와 조문한 것이 올해에도 몇차례 된다. 현역 시절 건강을 자신하면서 밤샘을 마다하지 않던 고인을 떠올리면 얼른 수긍이 가지 않지만, 그때 건강관리에 소홀했던 것이 모르는 사이 병을 키운 것이다. 이럴 때마다 '역시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지난 주말 고교 동기회의 정례 모임이 있었다. 작년까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을 즐겨 찾았는데 등산 대신 야유회로 바뀌고 프로그램도 운동 위주에서 볼거리와 먹거리 중심으로 이동했다. 회갑이 지나 어느새 예순 중반에 놓이게 되니 고도 차이가 있는 곳은 천천히 걷는 것조차 버거워진 터라 어쩔 수 없게 된 탓이다. 그러고보니 직장 생활할 때 들었던 각종 동아리에서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등산이 사라졌다. 열에 여덟·아홉은 신체 기능이 산에 오르내릴 만큼의 수준 이하로 떨어져 등산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오십대 중반까지 무박으로 지리산을 종주하고 설악산 공룡능선도 다람쥐처럼 날아다녔던 산벗 가운데 요즘에도 시간이 나면 산에 오르고 있다고 말하는 친구는 없다.
연로한 부모가 건강을 잃고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면 자녀의 생활도 활력을 잃는다. 특히 간병이 필요한데다 기간도 길어지면 그 가족은 심신이 피폐하고 비싼 간병비에 궁핍해져 끝내 해체될 수 밖에 없다. 이를 막으려면 부모 세대부터 '구구팔팔 백두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구팔팔 백두산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은퇴 직후부터 '일십백천만' 법칙을 실천하는 것이 그 비법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일 : 하루에 한가지 이상 좋은 일을 하고 ▲십 : 하루에 열번 이상 웃고 ▲백 : 하루에 백자 이상 글을 쓰고 ▲천 : 하루에 천자 이상 글을 읽고 ▲만 : 하루에 만보 이상 걷는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나의 일상에서 '백천만'은 여전히 쉼 없이 이뤄지고 있으니 '일십'만 실천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출근길 경의중앙선 열차 차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들판은 이제 폭우와 폭염을 견뎌내고 익어간 것들로 완연한 황금빛이다. 가수 노사연은 '나이듦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익어가는 것은 나이 들수록 뒷세대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구팔팔 백두산' 할 수 있는 인생은 잘 익어갔다는 증표가 아닐까 한다. 하루 하루 '일십백천만' 법칙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일상을 보내야겠다.
전인엽 본지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