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로 1776년, 근대의 출발선… 그리고 먼 길을 돌아온 대한민국
1776년은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지 2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을 출간한 해이기도 하고,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이 상업화된 해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이 1776년에 일어났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독립선언서는 최초로 근대국가의 문을 연 문서였다. 자유, 평등, 행복추구권이 하늘로부터 받은 권리라는 점을 역설했다.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유럽 제국들에 대항하여, 인권이야말로 하늘에서 온 것이고 왕을 비롯한 누구도 빼앗을 수 없음을 천명했다.
이후 미국사는 독립선언서를 실현하는 과정이자, 독립선언서가 내포한 자유와 평등 간의 긴장을 풀어가는 역사이기도 하다. 독립선언서는 1789년 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국부론은 국고에 쌓인 금이 국부의 원천이 아니라, 인적·물적 자산이 자유롭게 활동하여 이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득이 국부의 원천임을 밝혔다. 보호무역주의와 중상주의가 아닌 자유무역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국민경제의 번영과 평화적인 국제질서의 초석임을 밝혔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공장제 대공업과 증기선, 증기기관차 등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교통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1776년은 조선에서 정조(正祖)가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정조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는데, 당파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기에 그렇게 평가되는 듯하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근대 입헌혁명이 시작된 해인 1776년부터 24년 동안 재위한 정조의 정책은 반동적인 것이 많았다.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울 정도로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지만, 청을 다녀온 북학파들이 유행시킨 패관문학은 엄금했다. 이러한 잡서는 규장각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문체반정으로 불릴 정도로 억압적인 문화정책은 가히 연성 분서갱유라 불릴 만하며, 같은 시기 독립선언서에 자유와 행복추구권이 명시된 것과 대비된다.
그는 천주교 역시 성리학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격했다. 정약용 등의 천주교인들은 유배에 처해졌고 이들의 재능은 활용되지 않았다.
정조는 10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했다. 이 끔찍한 기억은 그로 하여금 한양 도성을 멀리하게 했다. 그는 국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수원에 화성을 축조했고 아버지의 묘를 그곳에 모셨으며 화성 행차를 즐겨했다. 장용영이라는 경호부대를 따로 두기도 했다.
이 모든 자원은 민생에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군주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효보다는 백성에 대한 충이 더 앞서는 덕목임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당파를 멀리한 그는 김조순이라는 사돈에 과하게 의지했고, 이후 순조, 헌종, 철종 모두 안동 김씨의 사위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쟁을 피하다가 세도정치의 문을 활짝 연 셈이다. 당파는 무익하나마 그래도 이념논쟁을 하였으나, 세도정치는 이익집단이 정권을 장악하여 최소한의 견제장치가 없었다. 대원군의 반짝 개혁으로 세도정치에 균열이 생겼으나, 장성한 고종은 다시 여흥 민씨의 품에 안겼다. 정조의 즉위 이후 이어진 퇴행은 조선을 세계사적 격변에 마주할 수 없게 했다.
그 퇴행의 끝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1776년에 저만치 앞서 나가던 영미와 이제는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한국은 국부론이 주창한 세계무역에 나라의 운명을 걸고 뛰어들었으며, 고도화된 기술자본과 숙련된 대규모 노동력을 동시에 형성했다. 또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주창한 자유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혁명과 입헌혁명은 선진제국보다 무려 200여년 뒤진 것이었으나, 불과 몇 세대만에 따라잡은 것이다.
이수현 변호사
이수현법률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