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죽은 뒤 자식들에게 몇억 쥐여주는 게 무슨 소용인가. 당장 은퇴하고 국민연금 나올 때까지 쓸 생활비가 없는데….”
많은 은퇴자가 종신보험 증권을 보며 한 번쯤 해봤을 탄식이다. 이러한 노후 소득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금융당국과 보험업계가 2026년부터 전 생명보험사로 본격 확대한 제도가 바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다. 쉽게 말해 사후 유가족에게 지급되던 사망보험금을 피보험자가 살아있을 때 연금이나 생활비 형태로 앞당겨 받는 방식이다.
언뜻 보면 잠자고 있던 거액의 보험금을 생전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단비’ 같은 제도로 보인다. 실제로 과거 가입했던 고금리 확정형 종신보험을 해지하지 않고도 매월 일정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어 은퇴자들의 관심이 높다.
그러나 무턱대고 유동화를 신청했다가는 정작 손에 쥐는 돈보다 유족에게 남겨줄 가치가 훨씬 더 가혹하게 깎여나가는 ‘감액 비율의 함정’에 직면하게 된다.
사망보험금 1억원을 유동화한다고 해서 생전에 1억원을 전부 받아 가는 것은 아니다. 사망보험금은 ‘피보험자의 사망’이라는 보험사고가 발생했을 때 비로소 확정 지급되는 미래의 약정 금액이다. 이를 생전에 앞당겨 수령한다는 것은 보험사가 쌓아둔 ‘해약환급금’을 재원으로 삼아 연금 형태로 나눠 지급하는 구조다.
따라서 유동화 비율을 법적 최대한도인 90%까지 설정해도 실제 매달 받는 금액의 총합은 증권에 적힌 사망보험금 액면가보다 한참 밑돌게 된다.
문제는 ‘사망보험금 감액 비율’의 비가역성이다. 유동화 제도는 내가 매달 몇십만원의 생활비를 수령하는 순간 그에 상응하는 사망보험금 담보를 영구적으로 감액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1억원의 종신보험에서 80~90%를 유동화해 10년 동안 월 30만~40만원씩 생활비로 사용하면 유족에게 남겨질 잔존 사망보험금은 1000만~2000만원 수준으로 줄어든다.
만약 유동화 개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피보험자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감액 처리된 사망보험금 탓에 유족들은 당초 기대했던 수억원대의 유가족 생활 보장금 대신 빠져나간 생활비와 잔여 보험금만 수령하게 된다.
즉 유동화를 시작하는 순간 종신보험의 본래 목적인 ‘가장(家長) 부재 시 유족의 경제적 안전망’ 기능은 사실상 소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험을 해약해 목돈을 쓰거나 약관대출을 받는 것보다 나은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유동화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상환 의무가 없고 이자가 붙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관대출을 받아 생활비로 쓰면 매달 3~5%대 이자로 결국 보험금을 갉아먹고 강제 해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동화는 내 적립금을 쓰는 것이므로 추가 이자 부담이 없다. 또한 단순 해약 시 발생하는 세금 문제나 원금 손실 리스크 없이 ‘확정형 이율’을 기반으로 정기 수령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이다.
결국 핵심은 ‘내 가계의 우선순위’와 ‘감액 비율의 황금비율’을 설정하는 것에 있다.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 더 이상 거액의 유족 사망보험금이 필요치 않은 은퇴 가구라면 유동화 제도는 훌륭한 노후 보루가 된다. 다만 이때도 무조건 최대 한도인 90%를 다 넣기보다는 최소한의 장례비나 배우자를 위한 긴급 자금으로 쓰일 20~30%의 사망보험금은 남겨두고 유동화 비율을 60~70% 선에서 조절하는 것이 현명하다.
또한 신청 전 ‘지급 개시 연령’을 신중히 따져야 한다. 유동화는 신청 연령이 늦어질수록 총수령액이 커진다. 은퇴 직후 소득이 완전히 끊기는 크레바스 시기에 징검다리 형태로 5~10년 집중 수령할 것인지, 아니면 70세 이후 고령기 의료·간병비 용도로 유동화할 것인지 명확한 지출 목적을 먼저 세워야 한다.
한 번 유동화가 개시되어 지급된 사망보험금은 나중에 돈이 생겼다고 해서 다시 채워 넣거나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보험사가 ‘노후 연금’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줬지만 본질은 결국 ‘내 미래 유족 보장자산을 현금으로 깎아 먹는 교환 거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보험은 ‘과거 상품이 무조건 좋다’는 맹신도 ‘최신 상품이 무조건 합리적이다’라는 유혹도 모두 위험하다. 2026년 달라진 의료 환경에서 경제적 손실을 막는 유일한 정답은 자신의 진료 빈도와 가계 현금흐름을 냉정하게 대조해 보는 손익계산서 작성에 있다.
오동근
칼럼니스트 | 손해사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