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24주년 기획③ 보험 선진국 한국, 재보험은 이제 시작인가

창간 24주년 기획③ 보험 선진국 한국, 재보험은 이제 시작인가

창간 24주년 기획③ 보험 선진국 한국, 재보험은 이제 시작인가

창간 24주년 기획③ 보험 선진국 한국, 재보험은 이제 시작인가

창간 24주년 기획③ 보험 선진국 한국, 재보험은 이제 시작인가

창간 24주년 기획③ 보험 선진국 한국, 재보험은 이제 시작인가
한국과 싱가포르 보험시장을 단순 보험료 규모로 비교하면 한국이 훨씬 크다. 2025년 국내 보험사의 수입보험료는 266조6595억원으로 집계됐다. 생명보험 127조5061억원, 손해보험 139조1533억원을 합친 수치다. 반면 싱가포르는 내수 원보험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한국보다 훨씬 작은 시장이다.
그러나 재보험으로 범위를 좁히면 구도는 달라진다. 한국의 국내 재보험 수재보험료는 금융감독원 공식 집계 기준 2022년 14조9000억원이었다. 반면 싱가포르의 재보험료는 2023년 276억 싱가포르달러로, 아시아 재보험시장의 약 21%를 차지했다. 원보험 규모는 한국이 크지만, 아시아 재보험 거래가 모이는 중심지는 싱가포르인 셈이다.
■ 싱가포르는 어떻게 아시아 재보험 허브가 됐나
원보험과 재보험은 산업 구조 자체가 다르다. 원보험은 자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보험상품을 판매하고 계약을 관리하는 산업으로, 생명보험, 장기보험, 자동차보험, 실손보험처럼 한 국가의 소비자, 판매망, 규제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비중이 크다. 한국 보험시장이 큰 이유도 높은 보험 가입률, 장기보험 중심의 판매구조, 대형 보험사들의 국내 영업망 때문이다.
반면 재보험은 보험사가 인수한 위험을 다시 다른 보험사나 재보험사에 이전하는 시장이다. 대형 공장, 발전소, 선박, 항공, 자연재해, 사이버위험처럼 단일 보험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이 거래 대상이다. 이 시장에서는 특정 국가의 내수 보험료보다 위험을 국제적으로 분산할 수 있는 자본력, 가격산정 능력, 언더라이팅(인수심사) 전문성, 글로벌 브로커 네트워크가 더 중요하다.
싱가포르가 아시아 재보험 허브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인도, 호주·뉴질랜드, 중동 일부 지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지리만으로 허브가 된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에는 글로벌 재보험사, 원보험사, 브로커, 언더라이터, 손해사정, 위험 모델링, 자문, 자본시장 기능이 한곳에 모여 있다. 보험을 많이 파는 시장이 아니라, 여러 국가의 위험과 글로벌 자본이 만나는 시장에 가깝다.
정책 환경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는 금융허브 전략 아래 재보험사를 지속적으로 유치해왔다. 재보험사는 현지 판매망 부담 없이 역외 위험을 인수할 수 있고, 글로벌 브로커를 통해 여러 국가의 물건에 접근할 수 있다. 금융당국의 제도적 지원과 안정적인 감독체계, 영어 기반의 계약·분쟁 처리 환경은 글로벌 재보험사와 브로커가 싱가포르를 지역 거점으로 선택하는 배경이 됐다.
■ 싱가포르 재보험 허브를 키운 핵심 장치, SIRC
싱가포르 재보험 허브의 상징은 싱가포르국제재보험회의(Singapore International Reinsurance Conference, SIRC)다. 1991년 시작된 SIRC는 단순한 국제 콘퍼런스를 넘어, 매년 재보험 갱신 시즌을 앞두고 원보험사·재보험사·브로커가 실제 거래 조건을 논의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SIRC가 세계적인 재보험 행사로 성장한 핵심은 개최 시점과 참가자 구성이다. 행사는 매년 11월 초 열린다. 원보험사는 다음 해 필요한 담보 규모를 제시하고, 재보험사는 인수 가능한 위험과 가격을 검토한다. 모든 계약이 현장에서 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갱신 협상의 주요 방향은 이 시기에 사실상 구체화된다. 행사장의 중심이 연단보다 회의실과 미팅룸에 있는 이유다.
2025년 제21회 SIRC에는 84개국에서 3800명 이상이 참석했다. 2024년 행사에서도 참가자의 88%가 고위 임원급이었다. 재보험 계약은 단순히 보험료만 비교하는 거래가 아니다. 수억 달러 규모의 사고를 지급할 상대방의 신용도, 장기 거래관계, 클레임 처리 경험까지 함께 판단해야 하는 만큼 실무진만이 아니라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참석한다.
싱가포르 보험업계 관계자는 “SIRC는 동남아시아와 유럽, 미국, 중앙아시아 지역의 원보험사와 재보험사, 브로커가 한곳에 모여 실제 갱신 조건과 신규 거래 가능성을 논의하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코리안리와 삼성Re도 매년 부스를 마련하고 원보험사와 브로커를 상대로 회사 설명과 계약 미팅을 진행한다. 코리안리는 별도의 칵테일 행사를 열어 거래 관계를 강화하고 신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SIRC의 경쟁력은 행사 자체에만 있지 않다. 싱가포르에는 평상시에도 재보험사와 글로벌 브로커, 언더라이터, 모델러, 손해사정 인력, 자문회사, 인슈어테크 기업이 밀집해 있다. SIRC는 이미 형성된 재보험 생태계의 거래와 정보를 특정 시점에 집중시키는 장치인 셈이다.
■ 한국 재보험의 싱가포르 전진기지
한국계 보험사들이 싱가포르에 거점을 둔 이유도 이와 연결된다.
코리안리 싱가포르 지점은 1978년 문을 연 초기 시장 참여자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인도·파키스탄, 호주·뉴질랜드까지 관할하며 특약·임의 재보험을 인수한다. 2024년 수재보험료는 1839억원, 순영업이익은 약 270억원이었다.
코리안리의 강점은 장기간 축적한 거래 네트워크다. 동남아시아 재보험 물건 상당수가 에이온(Aon), 마쉬(Marsh) 등 글로벌 브로커를 통해 거래되는 만큼, 주요 브로커와의 관계는 여러 국가의 포트폴리오에 접근하는 통로가 된다. 최근에는 소프트마켓 전환으로 원보험사와 브로커의 협상력이 커지면서, 단순히 인수 지분을 늘리기보다 위험 구간을 나누고 변동성이 큰 손해 구간을 다른 재보험사에 다시 분산하는 방식으로 인수 여력을 조정하고 있다.
삼성재보험(이하 삼성Re)은 삼성화재 해외사무소가 아닌 현지 재보험법인으로, 자체 자본과 재무제표를 보유하고 아시아·태평양, 인도,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재보험을 인수한다.
삼성Re의 특징은 현지화다. 업계에 따르면 약 60명 인력 가운데 본사 주재원은 3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2024년 총수재보험료는 2억6604만 싱가포르달러로 전년보다 98.9% 증가했고, 총자산도 약 7억 싱가포르달러로 확대됐다. 다만 최근에는 언더라이팅 이익과 순이익이 감소하면서 외형 성장 이후 수익 안정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대보험브로커(HIB)는 위험을 직접 인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코리안리·삼성Re와 다르다. HIB는 현대해상의 재보험 중개 자회사로, 원보험사의 위험을 분석해 적합한 재보험사와 연결하고 가격과 조건을 조율한다. 싱가포르에서는 원보험 브로커와 재보험 브로커 면허가 구분되며, HIB는 재보험 중개업에 특화돼 있다.
현재 사업은 한국 연계 물건 비중이 높다. 현대차·현대건설·HD현대 등 그룹사의 해외공장과 사업장 리스크를 자문하고 이를 재보험시장에 배치하는 것이 핵심 사업 기반이 됐다. 다음 과제는 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현지 원보험사와의 관계를 넓혀 해외 비중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 회사의 존재는 한국 재보험산업이 국내 원보험시장 중심 구조를 넘어 글로벌 위험거래에 참여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글로벌 상위 재보험사와 비교하면 존재감은 아직 제한적이다.
글로벌 상위 재보험사들은 이미 인공지능(AI), 사이버위험, 자연재해, 대체자본, 리스크 모델링 분야에 대규모 자본과 전문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신종위험시장을 먼저 만들고 가격을 주도하는 쪽도 대부분 이들 대형 재보험사다.
결국 한국계 사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 외형 확대가 아니라 대형 위험을 가격화하고, 글로벌 자본과 연결하며, 신종위험을 인수할 수 있는 재보험 역량이다. 싱가포르의 한국계 거점들은 그 전환의 초기 기반으로 평가된다.
■ 한국 재보험시장에도 변화의 바람, KIIC
싱가포르에 SIRC가 있다면 한국에는 KIIC(Korea International Insurance Conference)가 있다. KIIC는 아직 SIRC처럼 재보험시장을 흔드는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 보험시장이 글로벌 재보험사와 브로커, 기술기업을 연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24년 첫 행사는 16개국 88개사, 약 500명이 참가하며 출발했다. 2025년에는 23개국 150개사, 약 900명으로 확대됐고, 2026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3회 행사에는 27개국 175개사에서 1300명 이상이 참석했다. 2년 만에 참가자가 약 2.6배로 늘어난 것이다.
2026년 KIIC의 주요 의제는 AI, 사이버위험, 자율주행, 자연재해, 기후변화였다. 보험사와 재보험사뿐 아니라 브로커, 인슈어테크, 위험관리 컨설팅회사, 기술기업이 참여했다. 별도의 파트너스존과 일대일 미팅 공간도 운영해 단순 발표행사에서 사업 협력 중심 행사로 범위를 넓혔다.
다만 KIIC와 SIRC의 성격은 분명히 다르다. SIRC가 재보험 갱신을 앞두고 가격과 담보 조건을 논의하는 거래시장에 가깝다면, KIIC는 아직 한국 보험사와 글로벌 재보험사, 기술기업, 위험관리 전문가를 연결하는 산업협력 플랫폼에 가깝다.
따라서 한국이 단기간에 싱가포르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한국이 가진 산업의 복합위험을 글로벌 보험시장에 제시하고 연결하는 방향이 현실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조선, 자동차, 원자력, 통신, 디지털 플랫폼 등 고도화된 복합 산업위험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산업은 화재, 공급망 중단, 사이버공격, 자율주행 사고, 기후위험 등 새로운 보험수요와 연결된다.
KIIC가 이러한 산업위험을 데이터·보험상품·재보험자본과 연결할 수 있다면 서울은 단순한 행사 개최지를 넘어 아시아 신종위험 논의의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다.
결국 KIIC의 의미는 한국 재보험시장이 글로벌 위험거래와 신종위험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있다는 데 있다. 싱가포르가 이미 형성된 재보험 허브라면, 서울은 한국 산업위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보험·재보험 수요를 제시할 수 있는 시장이다.
국내 원보험시장이 성숙 단계에 들어선 상황에서 한국이 재보험시장에서도 존재감을 키울 수 있을지가 한국 보험산업의 다음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