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는 ‘퀀텀 레디’인데, 국내 금융권은 아직 준비 부족
해외 금융권이 양자컴퓨팅을 미래 핵심 기술로 보고 연구와 실증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국내 금융권은 아직 초기 대응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투자에 역량이 집중되면서 양자기술은 관심과 투자 모두 부족하다는 평가다.
금융보안원은 최근 ‘해외 금융권 양자컴퓨팅 활용 동향’과 ‘양자내성암호(PQC) 전환 동향’을 담은 연구보고서 2종을 발간하고 금융권의 선제적 대응 필요성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사들은 양자컴퓨팅을 단순히 지켜보는 수준을 넘어 실제 업무 적용을 준비하는 ‘퀀텀 레디(Quantum-ready)’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실제 JP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는 옵션 가격 산정과 포트폴리오 최적화 알고리즘을 연구하고 있으며, 골드만삭스(Goldman Sachs)는 양자 알고리즘을 활용해 연산 시간을 단축하는 성과를 발표했다. 씨티그룹(Citigroup)은 신용평가와 금융사기 탐지 모델 개발에 양자기술을 활용하고 있고, HSBC 역시 리스크 관리와 가격 산정 분야에 양자기술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국내 금융권은 아직 양자컴퓨팅을 실제 경영 전략이나 투자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달 29일 열린 ‘양자기술 국회 세미나’에서도 기술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관심과 투자 모두 부족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경수 NH농협은행 정보보안부 국장은 “양자기술에 대한 부분은 금융권에서 아직 먼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현재 컴퓨팅 환경만으로도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는 “보안 담당 부서는 PQC 적용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사업 부문의 관심이 부족하다”며 “정부 과제 참여도 기술 확보뿐 아니라 관심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밝혔다.
금융권에서는 생성형 AI 도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부분의 IT 투자와 인력이 AI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양자기술은 당장 수익으로 이어지는 사업 모델이 많지 않은 데다 전문 인력도 부족해 기술 검증과 연구개발 속도가 더딘 상황이다.
김 국장은 “양자기술도 결국 관심이 있어야 투자와 연구가 이어질 수 있는데 현재는 그 단계까지 가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PQC 확산을 추진한다면 금융권을 이끌 수 있는 선도기관을 선정해 관심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향후 더 큰 비용을 치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양자컴퓨팅이 상용화되면 현재 사용 중인 공개키 암호체계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무엇보다 정부 차원의 명확한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엄상윤 아이디퀀티크 대표는 “기업이 한 번에 양자기술을 도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산업별 전환 가이드라인과 테스트베드가 마련돼야 기업들도 단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와 유럽은 금융권을 대상으로 양자보안 전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며 국내도 산업별 세부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은정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양자기술연구소 센터장도 “금융 분야는 무엇보다 양자보안 대응이 시급하다”며 “금융권 공동 협의체를 구성하고 연구기관과 함께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금융 분야에서도 양자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중헌 고려대학교 교수는 “기술보다 더 큰 문제는 인력”이라며 “학생들이 양자 분야를 미래 산업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금융권에서도 연구와 활용 사례를 적극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