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보논단 장발장과 마들렌
최근 특출난 연기파 배우가 연예계 완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연기력도 뛰어나고 인기를 모은 작품에서 주로 애국 열혈지사를 맡았을 뿐더러 스타 반열에 오른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정의로운 편에 서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기에 나도 그의 팬이 됐다. 이 때문에 언론 보도대로 소년 시절 실수를 저지른 것이 일부 사실이고 이를 다시 한번 반성하는 삶을 살기 위해 연예인으로서 인생은 여기서 중단한다는 그의 말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러다가 그가 고등학생 때 범한 비행이 단순한 학폭 수준이 아니라 흉악범죄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배신 당한 느낌이 들었다.
철없던 시절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죗값을 치렀으므로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뺏으면 안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저지른 실수가 인간성을 상실한 흉악범죄였고, 배우로서 활동하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후 광복절 선서까지 하며 쌓아온 정의로운 진보인사 이미지 조차 이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의심된다면 그래도 그를 두둔하고 옹호할 수 있을 것인지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장발장을 수용할 수 없는 우리 사회가 한탄스럽다”거나 “소년원 근처에 안 다녀본 청춘이 어디 있느냐”면서 여전히 두둔하고 옹호하고 있다.
경찰 기자로서 경험에 비춰 강력범죄 중 성범죄는 쉽게 용서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범죄보다 피해자와 가족의 삶을 짓밟고 철저히 파괴하는 악질이다. 피해자와 가족은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분노와 자책으로 일생을 보내고, 살아있는 동안 행여 범죄 피해 사실이 노출될까봐 이리 저리 이사를 다니며 꼭꼭 숨는다. 애써 범인을 잡은 경찰은 증거 수집차 피해자를 찾아나서게 되는데, 그 과정이 범인 잡기보다 더 어렵다. 흉악범의 경우 성범죄 피해자의 이런 특성을 알고 신고를 못하게 하는 수법으로 강간과 성폭행을 일삼는다. 배우가 철 없던 시절 저질렀다는 실수가 이처럼 뒤늦게 알려진 것도 성범죄의 이같은 특성 때문일 것이다. 이렇기에 법조계에는 그의 비행을 언론에 알린 사람은 피해 당사자보다 당시 공범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소속사는 성범죄 관련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가 수차례 걸친 강도짓과 윤간 등 끔찍한 성범죄를 서슴지 않았던 패거리의 일원이었던 것만은 팩트다.
그 배우를 빅토르 위고의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에 비유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장발장은 범죄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한 적이 없다. 장발장의 드러난 죄는 가난으로 며칠째 굶주린 누이와 7명의 조카를 위해 아무도 없는 빵집에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손을 넣어 빵을 훔쳐 달아나다 걸린 것이 전부다. 그로 인해 그는 5년형을 선고 받았고, 죄에 비해 형벌 수준이 과하다 싶어 시도한 네차례 탈옥으로 14년이 추가돼 무려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뒤 전과 기록으로 인해 돈이 있어도 식당과 여관에서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다 미리엘 주교의 도움으로 그의 주교관에 머물게 됐고, 이번에는 주교의 은식기를 들고 달아났다가 잡혔다. 그는 경찰서까지 찾아와 그의 범죄를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고 용서하며 아끼던 은촛대까지 쥐어주는 주교의 모습에 깊이 깨달아 이후 평생을 늘 반성하고 참회하는 태도로 살아가게 된다. 그가 지방 소도시의 시장이 된 것도 과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추대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마들렌이라는 가명을 쓴 것은 앙시앙 레짐의 부조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그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 고심하다가 마침내 혁명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런 장발장을 배우의 옹호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은 빅토르 위고를 욕먹이는 짓이다.
그 배우는 예능 방송 출연이나 기자 회견 때 종종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에서 아버지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다고 말하곤 했다. 나도 그렇게 말하는 그를 보면서 “참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의 은퇴 선언 파문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의 본명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요즘에도 연예인 이름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고 드러내면 더 좋아보이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를 감추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널리 알려지면 숨겨왔던 과거가 밝혀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그에게 “어둠 속을 헤매는 청소년의 좋은 길잡이”라고 상찬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피해자와 가족은 또 한번 멍들도록 가슴을 내리치고 부들 부들 떨었을 것이다.
그의 은퇴 선언 파문은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 진영의 시각으로 판단할 사항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라봐야 한다. “소년원 근처에 안 다녀본 청춘이 어디 있느냐”는 위인의 말도 가당치 않다. 철없던 시절 소년원 근처에 갈 수 있을 정도의 비행을 저지른 적도 없거니와, 주변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냈고 주변 사람 또한 흉악범죄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연예인으로서의 인생을 여기서 접겠다고 결심한 그가 지금부터라도 사죄하고 참회하면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세로 살아갔으면 한다.
전인엽
본지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