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위기 ‘지수형 보험’ 제자리걸음… 제도·예산은 뒷걸음

기후위기 ‘지수형 보험’ 제자리걸음… 제도·예산은 뒷걸음
기후재해가 일상화되면서 보험산업이 근본적 전환점에 서 있다. 폭염, 홍수, 태풍 등 극단적 기상현상이 잦아지며 기존 실손보상(Indemnity) 방식만으로는 속도와 규모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자각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상지표를 기반으로 자동보상되는 ‘지수형(Parametric) 보험’이 차세대 리스크 관리 솔루션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인공지능(AI)과 위성데이터를 결합한 지수형 보험이 빠르게 확산되는 반면 국내에서는 예산 삭감과 제도 미비로 도입 속도가 더딘 상황이다.
지수형 보험은 일 강수량, 풍속, 기온 등 기상지표가 사전에 설정된 기준치를 초과하면 실제 피해조사 없이 보험금이 자동 지급되는 구조로, 보상 절차가 간소화되고 행정비용이 크게 절감된다는 점에서 기후재해 시대의 효율적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해외에서는 이미 빠른 속도로 확산 중이다. 카리브해재난위험보험기구(CCRIF)는 바람세기와 지진가속도 지수를 활용해 재난 발생 시 즉시 보험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미국·유럽·중국에서는 위성자료와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지수형 상품이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4년 162억 달러에서 2034년 513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수형 보험이 아직 제도화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보험업계는 다양한 세미나에서 AI 기반 지수 설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제도적 지원을 촉구했지만, 정부의 정책 방향은 여전히 미온적이다.
최근 확정된 정부의 ‘2026년 예산안’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지수형 기후보험 도입을 위해 배정했던 예산도 사실상 전액 취소된 것이다.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실이 9월 16일 밝힌 자료에 따르면 환경부가 2026년 기후보험 시범사업 추진을 위해 신청한 100억원 중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금액은 3억 원에 그쳤다. 확보된 예산은 기후보험 개발을 위한 연구 용도로만 사용될 예정으로, 당초 계획했던 야외 공공건설 근로자 대상 실제 보상 시범사업이나 데이터 인프라 구축 등 기초 단계조차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금융감독원도 제도 개선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금감원은 올해 3월 발표한 ‘기후 스트레스 테스트’ 분석에서 “전환이 지연될수록 충격은 더 급격해질 것”이라며 일부 은행이 특정 시나리오에서 BIS 총자본비율(Basel Capital Adequacy Ratio, CAR)을 충족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의원실이 9월 22일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금감원은 “기후 스트레스 테스트를 의무화하고 자산건전성 평가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의원의 질의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기후 변화 영향을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변수에 대한 가정이 필요해 의무화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달 24일 개최한 ‘기후변화 리스크와 지수형 보험’ 세미나에서도 이러한 기조가 보였다. 주원쥔 싱가폴 남양공대 교수는 지수형보험에 적극적인 반면 한국 측들은 회의적인 관점을 내놓은 것이다.
주원쥔 교수는 “지수형 기후보험은 전통적인 손해보험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해이와 역선택을 줄이고, 보험금을 신속하게 지급할 수 있어 효율적인 대안이지만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과제가 많다”며 “AI와 머신러닝 기반 솔루션을 활용해 혁신적인 지수형 기후보험 설계를 마련하고, 프로그램 수요를 개선하는 동시에 공공·민간 파트너십(PPP)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석영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AI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며, 실제로는 기존 실손보상의 손해평가 비용과 지수형보험의 트리거 기준 설정 비용 중 어느 쪽이 더 큰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표상으로는 동일한 강수량이라도 지역의 지형·배수 여건에 따라 피해 규모는 크게 달라진다”며 “강릉과 속초처럼 불과 55km 떨어진 지역에서도 한쪽은 극심한 가뭄을 겪는 반면 다른 지역은 피해가 미미한 경우가 있다”고 지수형 보험의 한계점을 지적했다.
백천우 코리안리 박사는 “보험상품이 재난 강도에 따라 설계되는 만큼, 지수형 보험은 평균 손실 수준을 기준으로 보험금이 정해진다”며 “하지만 실제 피해 규모는 평균값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보험에 가입했는데도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는 불만이 발생하기 쉽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지수형 보험만으로 모든 재난·기후위험을 완전히 커버하기는 어렵다”며 “지수형은 신속성과 관측비용 절감의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전통적인 손해보험·배상책임보험과 보완적으로 설계돼 피해 확산을 최소화하고 지역 사회의 회복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환경부는 기후정책 패키지의 일환으로 민간 지수형 기후담보를 추진하고 있다”며 “실제 효과를 내기 위해 위험도가 높은 지역의 지자체가 시민안전보험 등에 해당 담보를 연계해 가입하도록 하고, 보험료를 지원하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등 제도 정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