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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 실종된 '바바리 코트'의 계절

 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  실종된 '바바리 코트'의 계절

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 실종된 '바바리 코트'의 계절

백화점 등 유통가에서는 단풍잎 색깔이 바래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초겨울까지를 간절기로 따로 떼내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이 기간이 점점 짧아져 어느때부터인지 반팔에서 바로 패딩을 입게 됐지만 1990년대 전반만 하더라도 간절기는 패션업계의 제법 큰 시장이었다. 대표적인 아이템이 '바바리 코트'(트렌치 코트)다.

1980년대 후반 문화방송(MBC) 파리 특파원으로 에펠탑이나 개선문을 배경으로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리포팅하던 기자가 있었다. 당시 그런 그의 모습은 기자의 상징으로 이미지화되고 여성 시청자의 로망이 됐다. 주인공은 바로 엄기영씨다. 기자로서 팬덤을 구축한 것은 그가 처음일 듯 싶다. 그는 그때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파리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MBC뉴스데스크 메인 앵커를 거쳐 보도본부장과 사장을 역임했다.

일간지 기자 초년 시절 계절적으로 이맘때 찍었던 사진첩을 펼쳐보니 당시 데스크를 맡았던 차장이나 부장의 옷차림은 바바리 코트 일색이다. 점심 시간이 다가오면 낡고 구김이 심한 쑥색이나 갈색 바바리 코트를 입거나 손에 걸친 채 담배를 씹으면서 후배 기자를 몰고 인사동 한정식집을 찾았던 선배 기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 모습도 20년쯤 흐르면 저렇게 될까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됐다.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다. 바바리 코트를 입기에 딱 좋은 날씨를 만나기 어렵게 된 탓이다.

지난 주엔 더위가 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한파주의보가 발령됐다. 출근 열차 객실을 살펴보니 누군가는 여전히 반팔 차림이고 또 누군가는 발빠르게 패딩을 입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기후변화는 계절과 일상생활 풍경 등 시공간을 파괴할 만큼 위력적이다. 그러고보니 내게도 바바리 코트가 서너벌 있지만 근래에는 연중 두세번 입고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바바리 코트의 계절로 통했던 간절기는 점점 짧아지다가 어느새 거의 사라졌다.

샛노란 은행잎이 옐로 카펫을 이루는 늦가을 정동길 풍경은 올해도 기대하기 글렀다. 나뭇잎이 곱게 물들려면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지되 한낮엔 맑은 날씨가 이어지며 일사량이 많아야 한다는데 지난 10월 한달간 맑았던 날은 며칠 되지 않는다. 18일까지는 매일 하루 한차례 이상 비가 오고 그렇지 않은 날은 잔뜩 구름이 끼거나 간혹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정도에 그쳤다. 이번에도 정동길 은행잎은 노랗게 익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빛바랜 초록 낙엽으로 생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짙다. 아마 이러다가 높고 푸른 가을 하늘도 옛날 얘기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기후변화는 초대형 리스크다. 철저히 대응하고 적절히 관리하면 기회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리스크 관리가 본업인 보험업계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내 보험산업 현단계에선 기회보다 위협적인 쪽이 우세하다. 이웃 일본과 중국 보험업계에 비해 대응 속도가 늦고 덜 적극적이다. 사내에 연구소 등 부서를 만들고 체계적으로 연구하거나 데이터를 축적하는 보험사가 많지 않다.

경의중앙선 출근 열차 차장 밖을 보니 논마다 휑하다. 부지런한 농부는 때 맞춰 추수를 마치고 겨울 채비에 나섰다. 버스로 갈아타려 신촌역에 내려 올려다보니 오늘도 높은 푸른 하늘을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하늘색과 높이가 어떻든 신촌역 광장 대왕참나무는 며칠전까지 녹색빛이던 잎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이고 서둘러 잎을 털어내며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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