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민원이 가장 많이 접수되는 업권은 보험이다. 금융감독원의 ‘2026년 상반기 금융민원 접수 및 처리 동향’에 따르면, 금감원에 접수된 보험 민원은 3만9963건이었다. 같은 기간 처리한 전체 분쟁민원 중 보험의 비중은 약 89%에 달했다.
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갈등이 집중되는 만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방대한 민원에서 반복되는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을 돕는 일이 시급하다. 그중 먼저 살펴볼 것은 지급 지연이다. 보험금이 필요한 순간에 처리가 늦어지면 소비자의 불안과 불만이 커질 수 있다. AI로 처리 과정의 병목을 찾아 불필요한 지연을 줄이는 것은 민원을 예방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보험금 청구가 한꺼번에 몰릴 때 AI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진다. 알리안츠는 호주에서 대규모 재해에 따른 정전으로 냉장고 속 식품이 상한 경우의 소액 청구에 AI를 도입했다. AI가 보장 여부와 기상정보를 확인하고 지급액 산정을 돕되, 최종 지급 여부는 사람이 결정한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며칠 걸리던 처리가 하루 또는 수시간으로 줄었다. 반복 업무를 줄이면서 소비자의 기다림을 덜어준 사례다.
국내 손해보험사들도 AI 활용을 보험 업무 전반으로 넓히고 있다. 메리츠화재는 상담과 임직원 업무지원에, 현대해상은 인수심사와 보상 안내에 AI를 활용한다. KB손해보험은 과실비율 산정과 민원 유형 분석에, NH농협손해보험은 사고보험금 심사에 적용하고 있다. AI가 상담을 넘어 소비자의 권익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판단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빌 게이츠는 최근 인터뷰에서 AI 업계의 자율규제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사전 안전장치와 감시체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보험업권도 이 문제를 고심해야 한다. AI가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결정은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과 재검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디지털 이용이 어렵거나 자신의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소비자에게도 그 통로가 열려 있는지 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보험사는 우선 자동으로 처리할 업무와 사람이 살펴야 할 사안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단순하고 근거가 명확한 청구는 신속하게 처리하되, 지급 거절·감액이나 자료가 서로 충돌하는 사안은 검토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담당자 화면에는 AI가 제시한 결론과 함께 적용한 약관 조항, 판단에 사용한 서류, 확인하지 못한 사항이 제시돼야 한다. 가입 당시 특약이 빠졌는지, 추가 증빙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지 원문과 대조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담당자의 검토가 AI의 결론을 그대로 승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거를 따져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충실한 검토를 위해 자료를 제공하는 과정에서는 개인정보 보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보험 민원자료에는 진단명과 치료 이력 등 민감한 정보가 담겨 있어 접근 범위를 무제한으로 열어둘 수는 없다. AXA는 공개형 AI 도구의 정보유출 위험을 지적하며 직원용 ‘Secure GPT’를 마련했다. 보험사도 승인된 환경에서 담당 업무에 필요한 정보만 조회하도록 하고, 외부 전송은 별도 승인 대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자료에 접근하고 전송한 기록을 남겨 이상 징후를 점검하는 절차도 중요하다. 판단의 투명성과 정보의 안전성을 함께 확보해야 소비자가 안심하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재검토를 요청할 수 있다.
보험금은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를 이어가는 힘이고, 사고를 겪은 가족에게는 일상을 되찾는 발판이다. AI로 보험금을 더 빠르게 지급하면서도 보험소비자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보험이 실현해야 할 신뢰와 포용이다.
정운영
금융과행복네트워크 이사장 | 한양대학교 지속가능경제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