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돼 있지만 타인을 향한 예의와 배려는 오히려 희미해지고 있다. 악성 댓글과 온라인 조롱, 혐오와 폭로가 일상화된 디지털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보다 반응과 데이터에 먼저 노출된다. 한병철의 신간 ‘존중 없는 사회’는 이런 무례함을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인공지능(AI) 시대를 둘러싼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바라본다.
‘피로사회(2012)’ 등으로 알려진 한병철은 기술과 신자유주의가 인간 삶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해 온 철학자다. 이번 책에서는 존중과 자존감, 사회적 유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피며 존중을 개인적 예절을 넘어 공동체와 민주적 대화를 지키는 조건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성과와 능력을 끊임없이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성과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성과·돈·지위로 평가하고, 사람들을 끊임없는 비교와 자기증명으로 내몰면서 존중의 토대를 허물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경쟁은 소셜 미디어에서 ‘누가 더 많은 관심을 얻느냐’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긍정적 반응을 얻지 못하면 배척당했다고 느끼고, 지속적인 비교와 이상화된 이미지에 노출되면서 불안과 자존감 저하가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디지털 기술은 이 같은 흐름을 한층 심화한다. 저자는 우리가 소비하고 소통하는 동안 알고리즘이 행동을 관찰하고 예측하며, 무엇을 보고 누르고 공유할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강압적인 명령보다 편리함과 매혹을 기반으로 작동하기에 이용자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데이터에 기반한 추천과 자극 속에서 행동이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AI 시대의 위기는 기술 자체보다 이런 보이지 않는 통제와 끊임없는 평가가 인간관계와 자율성까지 흔드는 데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소셜 미디어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도 어렵게 만든다. 화면 속 상대는 한 사람의 ‘얼굴’을 지닌 존재라기보다 프로필과 정보로 환원되기 쉽고, 비슷한 생각끼리 모이는 환경은 다른 의견을 경청할 기회를 줄인다. 감정을 즉각 표출하는 소통이 확산할수록 공적 대화에 필요한 절제와 정중함도 약해진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해법은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찾는다. 한병철은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실재적 상상력’, 즉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떠올리는 능력과 ‘몸에 밴 사려깊음(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상대의 말을 듣고 교감하는 능력)’을 통해 타인에 대한 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재즈 합주에서 발견한 상호 존중도 하나의 모델이다. 각자가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서로를 경청하고 어울려 연주하듯, 공동체 역시 타인을 밀어내지 않고 차이를 조율할 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에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이 등장해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옮긴이 정창호 박사는 책 곳곳에 관련 철학자의 사상을 압축한 해설과 주석을 더했다. 정 박사는 이 책을 “존중 없는 시대의 모습과 원인을 탐사하고, 그 해결 방향을 독자와 함께 모색하려는 근본적 저널리스트의 폭로 기사이자, 관성적인 사유에 균열을 내려는 철학적 마술사의 공연”이라고 표현한다.
‘존중 없는 사회’는 AI와 알고리즘이 인간의 선택과 관계에 점점 더 깊이 개입하는 시대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묻는다. 나아가 더 빠르고 많이 연결되는 것보다 타인을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고, 적절한 거리를 두며 경청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존중 없는 사회 (AI시대, 사회적 위기) / 한병철 지음 / 간디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