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작열하는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 평생 가꿔온 포도나무들이 거센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한 해 동안 무려 3만8000에이커의 농장이 문을 닫았고, 50만 톤 이상의 포도가 수확조차 되지 못한 채 밭에서 썩어가고 있다니 가끔 와인을 찾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얘기다.
제법 흥행에 성공하고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던 영화 ‘사이드웨이스’에서 재배하기 까다롭고 섬세하며 특별한 환경과 정성이 필요해 귀족 품종으로 등극했던 그 ‘피노 누아(Pinot Noir)’가 몰락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보건 당국의 건강 경고나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치의 변화’를 외면한 채, 과거의 영광에 취해 새로운 세대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게 근본적인 쇠락의 이유가 되었을지 모른다.
본래 와인을 제대로 즐기려면 코르크 마개를 조심스레 따고, 품종에 맞는 잔을 준비해야 한다. 라벨에 적힌 난해한 외국어와 원산지를 외우는 수고도 감내해야 한다. 그 틈을 파고들어 재미와 스토리로 쉽게 풀어낸 만화 ‘신의 물방울’이 한때 많은 애호가들의 손에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직관과 효율의 시대에 태어난 Z세대에게 와인은 더 이상 격조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기성세대의 고루한 루틴이자 낡아 보이는 허례허식일 뿐이다. 그들은 코르크와 씨름하는 대신, 캠핑장에서 캔 뚜껑만 ‘딸깍’ 따면 상쾌함이 터지는 알코올 탄산수나 하이볼로 차갑게 돌아서 버렸다.
소비자의 욕망이 권위적인 격식에서 직관적 유희로 역전되었음에도, 와인 업계는 여전히 낡은 오크통 속의 전통만을 고집하다 붕괴를 맞이한 셈이다. 이러한 지각변동은 비단 캘리포니아 와인 업계만의 비극이 아니다. 역사는 일찍이 트렌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몰락한 거인들의 무덤을 수없이 보여줬다.
19세기 산업혁명기 철도라는 거대한 시대의 맥박이 뛰기 시작했을 때, 더 튼튼한 마차 바퀴와 화려한 채찍질 기술만을 연구하던 마차 제조업자들은 철저히 멸망했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하고도 기존 필름 시장의 알량한 수익을 지키려다 파산한 코닥(Kodak)의 사례는 고전이 됐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라는 미증유의 해일이 전 산업을 덮치고 있는 지금, 수많은 기업의 경영진들이 밤잠을 설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혹시 우리 회사가 제2의 코닥이나 캘리포니아의 불타는 포도밭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악몽을 꾸기 때문이다. 그 멸망의 공포를 알기에, 깨어있는 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경영 혁신을 거듭한다.
과거 윈도우(Windows) 운영체제에 갇혀 침몰해 가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사티아 나델라 CEO 취임 이후 완벽하게 부활했다. 비결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혁신이었다. ‘모든 것을 안다(Know-it-all)’는 오만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배운다(Learn-it-all)’는 조직 문화로 혁신을 단행한 덕에 오늘날 클라우드와 AI 시대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배달피자 전문 업체였던 도미노피자 역시 “우리는 피자 회사가 아니라 피자를 배달하는 IT 회사다”라고 선언하며 낡은 틀을 깨부수고 거대한 혁신을 이루어 냈다.
이러한 변화의 파도는 딱딱한 기업 생태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중의 호흡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문화 예술계에서도 파괴적 혁신은 일상이 됐다.
숏폼 콘텐츠에 길들여진 Z세대의 호흡에 맞춰 대중음악은 과감히 1절 전주를 없애버리거나, 곡의 속도를 빠르게 돌리는 스페드 업(Sped-up) 버전을 공식 음원으로 발매한다. 2시간짜리 영화 대신 1분짜리 요약본과 숏폼 드라마가 극장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으며, 미술과 패션계에서는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젠더리스(Genderless)와 AI가 디자인에 직접 개입하는 등 기존의 문법을 무참히 파괴하고 있다.
대중의 호흡이 변할 때 낡은 형식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주파수를 맞춘 예술만이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산업과 예술의 격변 속에서, 우리 개인의 삶은 어떠한가.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쏟아지는 새로운 기술과 낯선 트렌드 앞에서 우리는 뒤처질까봐 불안해하고(FOMO), 발버둥 치며, 때로는 애써 눈을 감아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변화의 파도를 두려움이 아닌 능동적인 에너지로 바꿔 ‘트렌드세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남다른 결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정답이라 믿어온 낡은 와인잔이 어쩌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서늘한 문제의식이며, 세상과 타인의 낯선 행동을 배척하기보다 새로운 툴과 기술을 기꺼이 나의 장난감으로 쥐어보는 호기심이다.
결국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파도의 방향을 읽어내고 기꺼이 올라타는 짜릿한 성취감이야말로, 낡은 껍데기를 벗어 던지게 만드는 진짜 원동력이 아닐까.
아일랜드의 위대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다시 소환할 때가 됐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박치수
청주대학교 교수 | 前 교보생명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