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서민금융정책도 다르지 않다. 햇살론을 비롯한 정책서민금융의 대위변제액은 3년 연속 1조원을 넘었고, 일부 보증상품의 회수율은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
정부가 대신 갚아 준 돈이 사실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원인은 뜻밖에 단순하다.
‘서민금융’은 서민과 금융, 두 단어로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그 어느 쪽도 정의한 적이 없다. 서민은 누구이며, 그들이 빌리는 은행의 돈이란 무엇인가.
이 두 물음을 건너뛴 채 ‘대출을 공급한다’는 말만 되풀이해 온 것은 아닌지 반문해야 한다. 첫 번째 물음은 “‘서민’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이다.
놀랍게도 한국의 서민금융정책에는 그 정의가 없다. 햇살론은 소득과 신용으로, 미소금융은 차상위계층 같은 자산으로, 햇살론유스는 거기에 연령까지 더해 대상을 가른다.
상품마다 서민의 경계가 다른 것이다. 소득의 서민, 신용의 서민, 자산의 서민, 연령의 서민이 한 이름 아래 뒤섞여 있다.
올해 네 종류의 햇살론이 둘로 통합됐지만, 정리된 것은 상품의 이름이지 서민의 정의가 아니다. 저소득이지만 신용은 멀쩡한 사회초년생, 소득은 있으나 다중채무에 눌린 자영업자, 소득도 신용도 함께 무너진 한계가구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책은 이들을 ‘서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다. 대상을 정의하지 못한 정책은 성과를 잴 다른 잣대를 찾기 마련이고, 그것이 곧 공급액이다.
올해 몇 조원을 공급했는가가 성공의 척도가 되는 순간, 그 돈이 누구에게 닿아 무엇을 바꾸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게 된다. 환곡이 변질된 경로도 정확히 이것이었다.
진휼이 절실한 빈민과 종자가 필요한 농민을 가리지 않은 채 곡식을 강제로 배분했고, 분급량 자체가 목표가 되자 제도는 끝내 제도 자신을 위해 작동했다. 두 번째 물음은 “서민이 빌리는 ‘돈’은 어디에서 조달한 자금인가”라는 것이다.
흔히 은행은 예금자가 맡긴 돈을 모아 빌려준다고 여기지만,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영국 중앙은행은 2014년 분기보고서 ‘현대 경제의 화폐 창조’에서 은행은 대출을 실행하는 바로 그 순간, 차주의 계좌에 같은 액수의 예금을 새로 만들어 낸다고 설명했다.
쌓여 있던 돈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회계 장부 위에서 새 돈을 창조하는 것이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은행가가 펜을 놀려 대출을 승인하는 순간 생겨난다 하여 이를 ‘만년필 화폐’라 불렀다.
즉 우리가 통장에 가진 예금은 사실 은행이 우리에게 진 빚이지, 은행이 어딘가 빌려줄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은행은 돈을 옮기는 창구가 아니라 돈을 만들어 내는 기관이다.
물론 은행이 돈을 무한정 만들지는 못한다. 부실이 늘면 자기자본이 깎이고, 바젤Ⅲ 규제와 통화정책이 신용 창조에 겹겹이 제동을 건다.
은행은 신용을 창조하는 강력한 기관이지만, 바로 그 원리 때문에 위험한 대출을 구조적으로 기피할 수밖에 없다. 반면 대부업체와 여신전문금융회사, 사채업자는 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들은 자기자본이든 빌려온 자금이든, 실재하는 자기 돈을 빌려줄 뿐이다. 회수하지 못하면 손실은 고스란히 제 몫이 되고, 은행과 달리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도 예금자보호 같은 공적 안전망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이 매기는 높은 금리는 적어도 일정 부분 자기 돈을 거는 데 따르는 ‘위험의 가격’이다. 금융은 이 차이 위에서 세 갈래로 나뉜다.
사회가 위임한 신용 창조의 특권을 쥐고 무거운 규제와 공적 안전망 아래 움직이는 은행은 제도권 공금융(公金融)이다. 그 바깥에서 자기 자본으로 대출을 하지만 ‘대부업법’과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라 설립되어 금융감독을 받는 여신전문금융회사와 대부업체는 제도권 사금융(私金融)이다.
그리고 어떤 등록도 감독도 받지 않는 채 음지에서 움직이는 사채업자가 불법사금융이다. 흔히 ‘사금융’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지지만, 제도권 안의 사금융과 제도권 바깥의 불법사금융은 법적 지위도, 작동 원리도 전혀 다르다.
그런데 이 세 갈래의 이름표를 실제로 하는 일과 나란히 놓아 보면 기묘한 역전이 드러난다. 공금융, 곧 은행은 정작 가장 안전한 사람만 골라 받는다.
위험한 차주를 걸러내는 것이 그 숙명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 돈을 거는 제도권 사금융은 공금융이 문턱 밖으로 밀어낸 바로 그 사람들을 떠안고, 그 대가로 가장 약한 서민에게 가장 가혹한 값을 매긴다.
공적 성격을 지닌 쪽이 가장 사적으로 움직이고, 사적 자본이 공금융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전, 서민금융정책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제도권 사금융을 옥죄면, 공금융이 받아 주지 않는 그 사람들은 등록조차 되지 않은 더 깊은 어둠 즉 ‘불법 사금융’으로 떠밀린다.
이 역설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법정최고금리를 낮추면 제도권 사금융인 등록 대부업체마저 은행과 같은 원리로 위험한 차주부터 밀어내고, 밀려난 이들은 불법사금융인 사채시장으로 향한다.
실제로 2021년 법정최고금리를 연 20%로 내리는 과정에서 등록 대부업체의 대출잔액은 2년 반 만에 약 16조원에서 12조원으로 4분의 1 가까이 줄었고, 그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불법사금융 피해 신고는 5년 내 최대치로 불어났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두 단어를 건너뛴 데 있다.
우리는 누구를 도울지 정의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돈이 어떤 돈인지도 묻지 않은 채, 막연히 ‘서민에게 대출을 공급하면 해결된다’는 믿음에 기대 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기울어진 구조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72년의 8·3 조치와 2003년 카드대란이 실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음 글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