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간편결제, 이른바 ‘페이(Pay)’ 시장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결제망을 깔았던 일부 해외 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중국의 알리페이(Alipay)나 위챗페이(Wechat Pay)가 독자 큐알(QR)망을 새로 구축한 것과 달리, 한국은 이미 촘촘하게 형성된 신용카드 가맹점망을 적극적으로 흡수·연결하며 시장을 확장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25년 상반기 중 전자지급서비스 이용 현황’에 따르면 간편결제 하루 평균 이용 건수는 3378만 건, 이용액 1조464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각각 13.7%, 11.4% 늘었다. 소비자가 오프라인 매장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더라도, 실제 과정은 카드사 앱이 아닌 플랫폼 페이 결제 창을 거쳐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수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들은 플랫폼 특유의 편리하고 쉬운 사용 방식과 막강한 포인트 혜택을 내세워 시장의 지배력을 단단하게 다졌다. 그 결과 과거 인터넷 쇼핑 등 온라인 화면에만 머물러 있던 간편결제의 영역이 동네 편의점과 마트 등 실생활 오프라인 매장으로 빠르게 확대됐다.
결제 시장의 주도권은 전통적인 금융사가 아닌 거대 플랫폼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는 단계다. 국내 오프라인 스마트폰 결제의 출발점은 삼성월렛(Samsung Wallet, 구 삼성페이)이다.
2015년 출시된 삼성페이는 기존 카드 단말기에 스마트폰을 가져다 대기만 하면 곧바로 결제가 완료되는 MST(마그네틱 보안 전송) 기술을 내세워, 별도 인프라 없이도 전국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결제할 수 있는 환경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삼성월렛은 이후 한발 더 나아가 외부 플랫폼과의 연동으로 몸집을 불렸다.
2023년 3월 네이버페이(Naver Pay)를 시작으로 카카오페이(Kakao Pay) 등 주요 간편결제 서비스가 삼성월렛 안에 차례로 입점하면서, 삼성월렛은 단순한 삼성 전용 결제 수단을 넘어 다양한 페이 서비스를 한 곳에서 쓸 수 있는 ‘결제 플랫폼의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떤 페이 서비스를 쓰더라도 삼성월렛 하나로 오프라인 결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국 300만개 이상의 오프라인 가맹점이 사실상 모든 주요 페이 서비스의 결제 창구로 열리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연동이었다. 삼성월렛과의 연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해 몸집을 키운 것은 온라인 결제의 절대 강자 네이버페이다.
네이버가 지난달 6일 공시한 ‘2025년 연간 실적 발표’ 자료에 따르면, 네이버페이의 2025년 전체 결제액은 무려 86조1000억원을 기록하며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온라인 중심이던 결제가 오프라인으로 빠르게 확장되며 성장세가 가속화된 결과다.
소비자는 기존 카드 결제 방식 그대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네이버 포인트 적립 혜택을 동시에 누리게 됐다. 온라인에 갇혀 있던 플랫폼의 금융 영토가 오프라인 실물 경제까지 넓어진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선두 그룹의 튼튼한 연합 전선에 맞서, 토스페이(Toss Pay)와 카카오페이(Kakao Pay)의 오프라인 추격전도 갈수록 매서워지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기존 신용카드 결제망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오프라인 결제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고 가맹점과의 연결 고리를 강화하는 데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붓고 있다.
토스페이는 오프라인의 작은 동네 가게들을 대상으로 결제 수수료 부담을 낮춰주는 정책을 내세우며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이와 함께 토스플레이스가 자체적으로 제작한 결제 기계와 식당 테이블 위에서 바로 주문하고 결제하는 시스템을 외식업 매장에 대거 퍼뜨리며 공격적으로 오프라인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매장의 결제용 기계 자체를 토스의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여, 물건을 사는 소비자와 물건을 파는 사장님 양쪽 모두를 토스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 묶어두려는 치밀한 전략이다. 최근에는 고도화된 얼굴 인식 기술을 활용한 ‘페이스페이’ 서비스를 확대하며 새로운 결제 방식 도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카카오페이 역시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부터 동네 골목상권까지 촘촘한 바코드 및 QR코드 결제망을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 특히 젊은 세대가 가장 많이 찾는 다이소나 올리브영 같은 전국구 유통 매장들과 제휴를 맺고 현장에서 곧바로 가격을 할인해 주거나 포인트를 얹어주는 혜택을 쏟아내며 소비자들의 소비 습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들 빅테크 기업의 최종 목표는 단순한 결제 중개업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결제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의 집합이 아니라 소비자의 생활 패턴과 재무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종의 창고다.
차곡차곡 쌓인 소비자 결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출, 보험, 투자 등 고수익 금융 상품을 연결해 주는 '만능 금융 플랫폼'으로 우뚝 서는 것에 맞춰져 있다. ■ 강력한 고객 묶어두기, ‘금융의 일상화’가 가른 승패 플랫폼 기업들이 이렇게 단기적으로 국내 페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고객 묶어두기(Lock-in)’ 효과에 있다.
소비자는 단지 결제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네이버나 카카오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네이버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해 쇼핑하고, 카카오톡으로 친구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며, 토스로 생활비를 간편하게 이체하는 일상 활동이 자연스럽게 결제라는 행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플랫폼 기업들은 자사 앱 안에서 소비자가 머무는 시간을 단 1초라도 더 늘리기 위해 파격적인 보상 제도를 선보이고 있다. 물건을 살 때마다 곧바로 쌓여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 상자를 열면 무작위로 돈이 쏟아지는 랜덤 캐시백, 친구와 함께 결제 버튼을 누르면 추가로 주어지는 혜택 등은 소비자들에게 마치 재밌는 모바일 게임을 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반면 전통적인 카드사들의 포인트 제도는 쓸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거나, 혜택을 실제로 느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소비자들의 즉각적인 박수를 얻어내기 어려운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러한 경험의 큰 차이는 결국 결제 수단을 고르는 소비자의 손길이 플랫폼으로 쏠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카드사들은 대형 플랫폼 기업들이 결제 생태계를 장악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를 위해 2022년 말 업계 공동의 간편결제 연합 시스템인 ‘오픈페이(Open Pay)’를 출범시킨 바 있다.
잃어버린 고객과의 스마트폰 화면 접점을 다시 찾고 거대 플랫폼에 끌려다니는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취지다. 하지만 쓰기 편하고 혜택이 넘치는 플랫폼에 이미 빠져버린 소비자들의 굳어진 결제 습관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카드사의 참여마저 미뤄지면서 현재까지 시장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얻어내지 못한 채 혹독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페이 시장의 경쟁은 이제 단순한 결제 편의성 싸움을 훌쩍 넘어섰다.
빅테크 플랫폼들이 결제를 발판 삼아 대출, 보험, 투자 등 전통 금융 영역으로 빠르게 보폭을 넓히면서 시장의 무게중심 자체가 이동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페이 전쟁의 진짜 승부처가 결제 데이터의 활용 깊이에 있다고 본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3월 발표한 ‘2024년 지급수단 및 모바일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금융사와 IT 기업들은 비대면 방식에 대한 소비자 선호를 반영해 앱을 통해 처리할 수 있는 업무 범위를 조회·송금 등에서 대출·금융상품 가입 등으로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실제로 응답자의 81.3%가 최근 한 달 내 모바일금융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해, 플랫폼 중심의 금융 소비가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일부 플랫폼은 결제 이력을 분석해 맞춤형 소액 대출이나 보험 상품을 앱 화면에 자동으로 노출하는 서비스를 본격화하고 있다. 결국 국내 페이 시장은 ‘누가 더 많은 결제를 처리하느냐’의 싸움에서 ‘누가 소비자의 금융 생활 전체를 더 깊이 파악하느냐’의 싸움으로 진화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