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범의 60+Life story 조직이 닫힌 뒤, 나의 이름으로 다시 서야 하는 시간
2025년의 끝자락 12월,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 한쪽이 유난히 묵직하다. 12월 1일 필자의 친정인 하이인재원이 현대해상 본사로 인소싱되면서 16년의 시간이 하나의 문장처럼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공식 절차는 마무리됐고, 이제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12월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다. 2009년 10월 1일, 현대해상에서 28명의 교육 전문가들이 ‘하이인재원’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나는 가장 나이 많은 창립 멤버였다. 그날 이후 16년 동안 조직은 커졌고 교육과정도 조직의 모습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보다 나은 영업 교육을 통해 설계사들이 한 걸음이라도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겠다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년을 먼저 통과한 하이인재원 1호 퇴직자로서, 인소싱으로 더 이상 2호가 생기지 않아 영원한 1호로 남은 채, 바깥에서 이 조직의 마지막을 묘한 허전함과 씁쓸함 속에 바라보게 되었다.
이번 변화가 특히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숫자’에 있다. 인소싱이 결정됐지만 전체 연구원 가운데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인원만이 현대해상 본사로 이동하게 됐다. 누군가는 12월 1일 자로 새 명함을 받았고, 누군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같은 12월 1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승선 통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선 안내’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인소싱 명단이 처음 발표된 날, 사무실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겠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 결과가 내 앞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이제 바깥으로 나가면 내 커리어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인소싱 대상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마음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한숨은 돌렸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자리만은 아니다. 함께 교안을 만들고 밤늦게까지 교육장을 지키던 동료의 이름이 명단에서 빠졌을 때, 마음 한편에는 미안함과 어색함이 뒤섞였을 것이다. “그래도 잘됐네”라는 말이 오가더라도, 환하게 웃기보다는 조심스레 반응하게 되는 것이 이런 순간의 정서다.
반대로 인소싱 대상에서 빠진 이들은 또 다른 질문과 마주한다.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이 회사 밖에서도 통할까?”, “내 나이에 새 조직으로 옮기거나 프리랜서로 나서는 게 가능할까?”, “가족은 이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실 이 질문은 하이인재원 식구들만의 고민은 아니다. 예비 퇴직자라면 누구나 언젠가 마주하게 될 질문이다. 한 조직의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인생 계획표’를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인소싱 과정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조직의 종료는 문서 한 장, 이메일 한 통으로도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서와 이메일 사이의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감정은 그렇게 쉽게 접히지 않는다. 16년 동안 이곳은 누군가에게 첫 발령지였고, 누군가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커리어의 무대였다. 이 각각의 서사가 12월 한 달짜리 ‘정리 기간’ 안에 온전히 담기기는 어렵다.
이 변화는 모든 예비 퇴직자들에게 중요한 신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언젠가 조직이 아닌 나의 이름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특정 회사, 특정 조직만의 사연이 아니라, 50대 이후를 준비하는 많은 직장인에게 “나는 어떤 선택의 여지를 만들어 두었는가”를 되묻게 하는 하나의 거울이다.
인생은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인소싱도 구조조정도 정년퇴직도 대부분 우리가 기대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때 필요한 건 거창한 대비책이 아니라 “이제라도 내 인생 계획을 다시 써보겠다”는 마음이다. 어떤 방식의 변화든 결국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앞으로의 시간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이인재원의 공식 시간은 멈췄지만, 그 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시간은 계속된다. 누군가는 현대해상 안에서, 누군가는 현대해상 밖에서 또 다른 16년을 써 내려갈 것이다. 중요한 건 어디에 서 있든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필요할 때 서로를 돕는 관계로 남는 일일 것이다.
2025년 12월 ‘하이인재원’이라는 공식 명칭은 사라졌다. 그러나 후배들은 또 다른 문을 조용히 열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연구원들, 그리고 곧 그 길을 걷게 될 예비 퇴직자들에게 묻고 싶다.
“조직이 정해준 다음 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다음 문을 열 준비는 되어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다면, 비록 12월의 공기는 차갑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조금 더 단단해질 것이다.
이종범
제3의 나이 연구소
금융노년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