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의 판례로 배우는 보험상식 똑같이 수레를 끌어도 보장이 다른 이유
- 업무 vs 일상 경계에서 생긴 배상분쟁 -
업무를 하다 보면 마트나 거래처에서 제공하는 이동용 수레를 사용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특히 납품이나 물품 운반을 하는 직종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레를 끌고 이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일상에서 흔히 하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제 보험에서는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가’에 따라 보장 여부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최근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한 분쟁 사례는 이러한 경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민원인은 거래처에 물품을 납품하던 중, 영업소에서 제공한 이동식 수레를 이용해 짐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작업을 마친 뒤 수레를 이동시키던 순간 고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수레가 미끄러져 나가면서 주차된 차량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차량의 수리비가 상당해지자 민원인은 평소 가입해 둔 일상생활배상책임보험(일배책)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보험사에 청구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수레를 끌고 이동하던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이므로, 민원인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상 중 사고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험사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보험사는 본 사고가 약관상 ‘직무수행 중 사고’에 해당한다며 보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약관에는 대부분 “피보험자의 직무수행으로 인한 배상책임은 보상하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원인은 이 조항이 너무 과도하게 적용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마트에서 고객이 카트를 끌다 다른 차량을 긁었다면 일상생활 중 사고로 보상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민원인은 “행동 자체는 똑같은데 단지 납품 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보상을 받을 수 없다면 너무 불합리한 것 아니냐”고 반발했습니다.
금융감독원은 양측의 주장을 비교한 끝에, 이번 사고는 일상생활 중 사고가 아닌 직무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민원인이 해당 장소를 방문한 목적은 개인적 용무가 아닌 ‘물품 납품’이라는 업무 수행이었습니다. 둘째, 사고 당시 사용한 이동식 수레 또한 업무를 위해 제공된 도구였습니다. 셋째, 사고가 발생한 행위 역시 업무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행위만 보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작일지라도, 그 행위가 어떤 목적과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가 보험 판단에서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실무에서 자주 마주치는 오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사람들은 흔히 “평소에도 하는 행동이니까 일상생활 중 사고다”라고 생각하지만, 손해사정에서는 사고 당시의 맥락과 목적, 그리고 피보험자의 역할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업무 목적의 이동 중이었는지, 회사를 위해 사용한 장비였는지, 해당 장소를 개인적 이유가 아닌 직무 수행을 위해 방문했는지 등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업무와 연계되어 있다면, 사고가 아무리 일상적인 동작 속에서 발생했더라도 일배책의 보장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영업자, 배달 기사, 납품 기사, 출장 기술자처럼 업무 중 이동이 잦고 각종 도구를 활용하는 직종은 일배책만으로는 충분한 보장을 받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개인 일배책만 있으면 왠만한 사고는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업무와 관련된 활동이 많은 직업일수록 오히려 업무·영업배상책임보험이 필수에 가깝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이건 일상이고, 저건 업무다”라고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에 자신의 활동 패턴과 보험 보장 범위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험은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어떤 보험이든 보장 범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특히 일상생활과 업무의 경계가 모호한 현대의 직업 환경에서는 예상치 못한 보장 공백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동식 수레 사고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동 속에서도, 그 순간의 목적과 맥락이 달라지면 보험의 역할 또한 달라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업무와 관련된 활동이 잦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보험을 다시 점검해 보고, 필요하다면 적절한 담보를 추가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대비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입니다.
김진호
미드미 행정사법인 손해사정법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