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연금 시장이 500조원을 넘어서면서 가입자 간 수익률 격차와 은퇴 이후 인출 전략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적립금 규모와 평균 수익률은 모두 개선됐지만,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개인형 IRP에서는 운용 방식에 따라 성과가 크게 갈렸다. 수급 개시 계좌가 60만좌를 넘은 가운데 퇴직연금을 단순히 쌓아두는 자산이 아니라 은퇴 이후 현금흐름을 만드는 소득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20일 발간한 ‘2025년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전년보다 16.1% 늘었다. 연간 수익률도 6.47%로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만 실적배당형 수익률이 16.80%, 원리금보장형이 3.09%로 운용 방식에 따른 차이가 컸다.
■ 상위 10% 실적배당형 집중… 하위권은 원리금보장형 쏠림
연평균 수익률(6.47%) 이면의 격차도 뚜렷했다. DC·IRP 기준 수익률 상위 10% 가입자는 19.5%를 기록한 반면 하위 10%는 0.5%에 그치며 수익률 격차가 39배에 달했다. 상위 10%는 적립금의 84%를 실적배당형으로 운용했지만 하위 10%는 74%를 원리금보장형에 뒀다. DC·IRP 가입자의 49.6%가 2~4% 수익률 구간에 몰린 점을 고려하면, 평균 수익률은 상위권의 적극적 운용 성과가 끌어올린 측면이 크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최근 반도체 주가 호황 등으로 적립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한 가입자와 원리금보장형에 방치한 가입자 사이의 ‘K자형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며 “퇴직연금은 가입자가 장기간 관심을 두지 않다가 퇴직이 임박해 노후 설계를 고민할 때가 돼서야 비로소 ‘내 돈’으로 체감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를 한참 앞둔 30~40대는 적립금 변경을 거의 하지 않고, 실적배당형 가입자도 연간 매매 횟수가 3~4회에 그칠 정도로 수동적”이라며 “저수익 상품에 머문 가입자를 끌어올리려면 디폴트옵션을 현실화하고 일임형 투자를 적극 허용하는 등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적립보다 중요한 ‘인출 전략’
이 같은 수익률 격차는 적립기에는 계좌 성과 차이로 보이지만, 은퇴 이후에는 실제 월수령액과 인출 지속 기간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 수령 단계의 선택도 중요해진다.
지난해 만 55세 이상 퇴직연금 수급 개시 계좌 중 일시금 수령은 83.5%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다만 금액 기준으로는 연금 수령 비중이 61.6%로 처음 60%를 넘었다. 연금 수령 계좌의 평균 수령액이 일시금 수령 계좌보다 큰 만큼, 적립금 규모가 큰 계좌를 중심으로 연금 수령이 이뤄지는 구조가 나타난다. 반면 계좌 수 기준으로는 여전히 일시금 수령이 많아 다수 가입자가 퇴직연금을 장기 소득보다 목돈으로 인식하는 흐름도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퇴직연금 운용의 핵심 과제로 ‘투자자산’과 ‘노후 안전자산’ 간 균형을 꼽는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은 원금 안정성 측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장기간 낮은 수익률에 머물 경우 은퇴 이후 생활비 상승과 장수리스크를 방어하기 어렵다. 실적배당형 상품은 수익률을 높일 수 있지만 은퇴 시점이 가까운 가입자에게는 손실 위험과 변동성이 부담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보험업계 관계자는 “인출기를 앞둔 가입자라고 해서 100% 안전자산만 고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성향에 따라 위험자산을 30% 안팎으로 편입하는 포트폴리오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본격적인 연금 인출기에는 위험자산 비중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안전자산 비중을 높여야 하지만, 물가 상승에 대비하려면 100% 원리금보장형에만 머무는 쏠림은 지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TDF·디폴트옵션 활용 확대
가입자는 우선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합산한 예상 연금수령액을 확인하고 은퇴 후 필요한 월 생활비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후 퇴직연금 자산을 생활비로 쓸 시기와 규모를 정하고, 단기 인출 재원은 안정적으로 관리하되 장기 운용이 가능한 자금은 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수익을 목표로 분산 투자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다.
직접 운용이 어렵다면 사전에 정한 투자 성향에 따라 적립금을 자동 운용하는 디폴트옵션을 활용할 수 있다. 은퇴 예상 시점에 맞춰 위험자산과 안전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생애주기펀드(TDF)도 대안이다. 지난해 TDF 수익률은 13.7%로 전체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을 웃돌았다.
금융당국도 퇴직연금의 기능을 적립금 관리에서 노후소득 관리로 넓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퇴직연금의 장수리스크 대응 방안’ 세미나에서 “퇴직연금은 일시금으로 받는 목돈이 아니라 장기간 지급되는 평생소득으로 기능해야 한다”며 사업자들에게 장기 연금 수령이 가능한 상품 구조 정비와 가입자별 노후소득 전반을 고려한 컨설팅 역할 강화를 당부했다.
하반기에는 고용노동부 및 사업자와 함께 퇴직연금 가이드북을 발간해 연금 적립부터 인출까지 다양한 사례와 노하우를 제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