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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업, ‘보장산업’에서 ‘자산운용산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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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보장 중심 산업’에서 ‘자산운용 산업’으로의 전환은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 새 보험회계제도(IFRS17) 도입 이후 보험사의 자산·부채 종합관리(ALM) 체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저금리·저성장 환경이 지속되면서 운용 전략의 혁신이 보험업의 생존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달 31일 열린 ‘2025 한국보험학회 정책세미나: 보험회사 자산운용의 과제와 대안’에서는 보험산업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자산운용’이 주요 화두로 다뤄졌다. 그러나 국내 시장은 여전히 보수적 규제 틀과 미성숙한 자본시장 인프라에 묶여 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송윤상 흥국화재 대표는 “보험은 더 이상 위험을 인수하는 업종이 아니라, 부채를 기반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보험사는 고객의 위험을 장기계약 형태로 인수해 부채를 지고, 이를 기반으로 자산을 운용한다”며 “단순 듀레이션 매칭을 넘어 손익 중심의 ALM 전략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보험회사는 단순한 위험보장자가 아니라 자산을 설계하고 삶의 지속가능성을 관리하는 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테슬라는 자동차가 아닌 ‘모바일 디바이스’를,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닌 ‘문화’를 판다고 정의하듯, 보험도 ‘리스크 해소’가 아닌 ‘자산운용’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보험업의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국내 시장은 여전히 보수적 규제 틀과 미성숙한 자본시장 인프라에 묶여 있다. 이제 보험산업은 단순히 위험을 보장하는 영역을 넘어 경제생활 전반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자산을 운용하는 산업으로의 진화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 경직된 자금조달 규제, 보험산업 성장의 발목

국내 보험산업이 자산운용 중심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핵심 성장 수단인 인수합병(M&A)에서는 여전히 ‘올드한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해외 주요 보험사들이 연간 수백 건의 M&A를 통해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반면, 국내 보험사의 M&A 성사 건수는 연평균 1~3건 수준에 머문다.

가장 큰 제약은 자금조달 규제다. 현행 법령상 보험사는 ‘재무건전성 유지’ 등 제한된 목적 외에는 채권 발행이나 차입을 통한 대규모 자금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대형 M&A나 해외 진출에 필요한 선제적 자금 확보가 차단되고 있다. 특히 신지급여력제도(K-ICS) 도입으로 인수 후 추가 자본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M&A 목적의 자금조달 규제 완화는 단순한 재무 안정성 차원을 넘어 글로벌 경쟁력 확보와 수익원 다변화를 위한 필수 과제로 지적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의 본질은 위험보장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산운용 역량이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라며 “유럽처럼 자산운용 중심의 산업으로 전환하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국내 보험사, ‘안정성 과잉’에 수익성 둔화

국내 생명보험사의 운용자산은 여전히 국공채 등 안정자산 비중이 높지만, 2023년 이후 국제회계기준(IFRS17) 시행으로 재무구조가 원가 중심에서 시가 중심으로 전환되며 ALM의 중요성이 커졌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새 제도 아래에서는 보험회사가 가진 자산과 부채를 계산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정해진 가격 평가에서 시가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금리가 오르내리면 이익·손실이 바로 반영된다. 이에 따라 보험사들은 손익 변동성 확대와 자본관리 부담, 정교한 ALM 체계 구축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실제 포트폴리오 변화를 보면, 생명보험사의 매도가능증권 비중은 2021년 73%에서 2024년 68%로 감소한 반면, 당기손익증권은 2%에서 16%로 급증했다. 손해보험사 역시 관계회사 및 특기 투자자산의 회계 인식 방식을 IFRS 체계에 맞춰 조정하며 재분류를 진행 중이다.

박정현 금융감독원 보험감독국 건전경영팀장은 “보험사는 장기 부채 구조를 감안해 주식 비중을 크게 늘리기 어렵다”며 “요구자본 부담과 변동성 탓에 투자 확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 밸류업 정책 등으로 일부 회사는 주식 비중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보험업계에 따르면, 삼성생명을 제외한 대부분 생명보험사의 직접 주식투자 비율은 1%에도 미치지 않는 수준이다.

또한 금리 환경 변화에 따른 손익 흐름에서도 생보사와 손보사 간 차이가 드러난다. 2023년 금리 급등기에는 생보사가 평가손실을 크게 입었으나, 2025년 들어 금리 안정과 함께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손보사는 부채 듀레이션이 짧아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업계 관계자는 “국공채 중심의 보수적 운용은 단기적 안정성은 확보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산·부채 불일치를 심화시킨다”며 “IFRS17 이후엔 ALM 효율화 없이는 연금시장 경쟁력 확보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단순 듀레이션 매칭을 넘어 금리 민감도, 유동성 버퍼, 스프레드 리스크까지 통합 관리하는 ‘고도화된 ALM’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지훈 손보협회 상무는 “보험부채 현금흐름, 계약해지 행태, 금리 민감도 등 장기 시계열 데이터를 표준화·집적하고 내부모형 승인절차를 유연화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금리·유동성 관리 전략을 보다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글로벌 보험사, ‘채권 중심’에서 ‘대체투자 중심’으로

지난 10월 발표된 국제결제은행(BIS) 보고서와 유럽보험연금기금(EIOPA)·미국보험감독관협회(NAIC) 통계에 따르면 주요국 보험사들은 채권 중심 운용에서 벗어나 대체투자·비상장자산·파생상품 등 다양한 자산군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추세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보험감독자협의회(IAIS)는 2025년 IMF·세계은행 그룹(WBG) 연차총회 기간 중 공동 패널토론을 열어 글로벌 보험사의 투자확대가 새로운 감독 리스크가 되고 있다며 규제 마련 필요성을 논의했다.

유럽은 여전히 채권 비중이 높지만 펀드·비상장주식 등 위험자산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은 전체 자산의 약 60%를 채권에 두면서도 사모펀드·인프라 등 ‘Schedule BA(대체투자)’ 자산을 꾸준히 확대 중이다. 일본 역시 대출과 신탁 중심 운용을 유지하면서도 해외증권·주식 비중을 점차 늘리는 흐름을 보인다.

반면 한국은 유가증권 비중이 70~80%로 높고, 대체투자·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은 여전히 낮다. 국내 생보사의 직접 주식 보유율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같은 ‘안정성 편중’ 구조가 수익성 둔화의 핵심 원인으로 지적된다.

OECD와 보험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일본 생보사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3.4%인 데 비해 한국 생보사는 5.4%에 그쳤다. 투자수익률은 한국 3.1%, 일본 2.8%로 큰 차이가 없는데도 자산운용 구조의 다양성 부족이 낮은 수익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수익성 격차의 배경에 ‘규제의 경직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범 숭실대학교 교수는 “현행 비율 규제는 분산투자와 사적 이용 방지를 명분으로 하지만 총자산·자기자본 대비 한도 설정은 과학적 근거가 약하다”며 “이 같은 규제가 유지되는 한 보험사의 자산운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행 자산운용 비율 규제와 사적이용 규제는 2003년 도입된 체계를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 생보사 상무는 “보험사가 소유할 수 있는 자회사의 한도를 총자산의 3% 또는 자기자본의 60% 중 작은 금액으로 제한하고 있어 현실적 제약이 크다”며 “22년 전 만들어진 규제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자산운용 다변화를 막는 직접 비율규제를 완화하고 위험관리 중심 감독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지훈 상무는 “독일·영국은 한도규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고, 위험관리체계·스트레스테스트·거버넌스 등 위험관리 중심 감독을 수행한다”며 “국내는 직접 한도규제보다 K-ICS 등을 통한 사후 건전성 감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규제 완화, ‘생산적 금융’을 넘어 ‘사업 영역 확장’으로

최근 금융당국이 생산적 금융 지원을 위해 벤처투자 위험가중치(RW)를 경감하고, 자회사를 통한 임대주택 사업을 허용한 것은 보험사의 장기자산 운용 폭을 넓히는 조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여전히 금산분리, 비율규제, 자회사 업무 범위 제한 등 구조적 제약이 남아 있어 ‘안정성 과잉’ 상태의 국내 보험업이 자산운용 중심 산업으로 진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자산운용의 효율성을 넘어 헬스케어·데이터산업 등 비금융 서비스와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제도 환경이 필요하다며 입을 모은다. 한 고위 관계자는 “보험의 본질은 상부상조에 있으며, 고객의 자산(보험사의 부채)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산업의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며 “자산운용 영역의 규제 완화는 단순 제도 변화가 아니라 혁신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획일적이고 낡은 규제 틀로는 수익성과 건전성 개선 모두 한계가 있다”며 “선진국들은 자율형 규제 속에서도 고객 피해 없이 산업 경쟁력을 높여왔다. 국내 보험산업도 더 이상 혁신을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지훈 상무는 “보험사는 더 이상 단순 채권투자자가 아니라 AI·반도체·바이오 등 첨단산업에 장기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며 “AI 기반 운용기법이 정착되면 리스크 예측력이 높아져 장기적 가치 중심 운용이 가능해지고, 산업 성장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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