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이 되면 금융권은 어김없이 ‘고객과의 동행’과 ‘평생 파트너’를 말한다. 보험은 사랑을, 은행은 신뢰를, 증권은 동행을 강조하며, 광고에는 노부모와 아이의 웃음이 등장하고 가족을 위한 선택으로 금융상품 가입이 제안된다.
‘인간중심’ 또는 ‘가족중심’이라는 서정적 환상은 광고마케팅 측면에서 그 유효적절함으로 인해 가장 안전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게으른 전략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여전히 유효한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리고 있는가다. 금융의 신뢰는 과연 연출될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 중심’은 고객 가치에 기반한 설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관계 유지와 감성에 기대어 부실한 상품 판매를 정당화해 온 영업 관행으로서의 인간 중심을 뜻하며, 이 구분 없이 반복되는 메시지는 결국 질문을 흐린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가장 위험한 것은 잘못된 대답이 아니라,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The most serious mistakes are not being made as a result of wrong answers. The truly dangerous thing is asking the wrong question.”라고 했다.
금융이 지금까지 던져온 질문은 ‘얼마나 가까운가’였지 ‘얼마나 정확한가’가 아니었다.
금융의 본질은 사실 신뢰보다 가용성(可用性, Availability)에 가깝다. 약속된 자금이 필요한 시점에 조건 없이, 지체 없이 집행되는가. 이 단순한 기준이 금융의 성능을 결정한다.
금융은 오랫동안 이 질문을 비켜가 왔다. 이유는 분명하다. 잘 작동하는 상품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더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복잡한 구조는 수수료를 높이고, 까다로운 지급 조건은 리스크를 고객에게 전가하며, 관계와 감성은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해왔다.
익숙한 문장을 지금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인간중심’이라는 이름 아래 유지돼 온 관행이 과연 금융 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는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관계에 의존한 영업 구조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밀어내며 고비용과 낮은 신뢰라는 이중의 부담을 키워왔다.
보험의 설계사 중심 판매, 은행의 프라이빗뱅킹(PB), 증권사의 고위험 상품 영업은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유사하다. 신뢰 관계를 전제로 상품이 판매되고 그 과정에서 정보 비대칭은 확대되며, 그 결과는 반복돼 왔다. 높은 수수료, 불투명한 비용 구조, 그리고 분쟁이다.
이 구조는 단순한 영업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상품 혁신보다 유통 유지에 자원을 집중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며, 관계에 의존할수록 상품은 단순해지기보다 오히려 복잡해진다. 설명이 아니라 신뢰에 기대기 때문이다.
그 사이 보험은 차별화된 상품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은행은 부동산 대출 중심의 안일한 수익 구조에 머물렀다. 투자자들은 더 높은 수익률과 투명성을 찾아 해외 시장으로 이동했다.
이 모든 현상을 관계 중심 구조 하나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그 구조가 혁신을 지연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금융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금융은 라이프사이클에서 필요한 부분, 비어있는 부분, 중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간과한 부분에 맞춰 유기적으로 결합될 필요가 있다.
기술은 이미 금융의 작동 방식을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AI)은 고객의 자산, 소비, 위험 성향을 분석하고 데이터는 상품의 적합성을 정량적으로 검증한다. 기술은 판단의 기준을 만들며, 그 기준이 향해야 할 곳은 결국 개인의 삶이다.
금융의 본질을 ‘신뢰’라고 대답하려면 재현가능하고 검증가능한 시스템을 통해서다. 진정한 ‘인간중심’은 관계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확한 분석, 투명한 구조, 일관된 기준 그리고 그를 통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이제 금융이 버려야 할 것은 오인된 ‘인간중심’이다. 설계사 수수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 상품의 복잡성을 통해 수익을 확보하는 방식, 설명보다 관계에 기대는 영업 관행이 그 대상이다.
5월의 금융권이 다시 ‘고객’을 말하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고객과 얼마나 가까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혁신은 기술을 도입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관계에 의존해 온 오래된 방식을 걷어내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