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사회는 데이터의 시대다. 고객의 보험 가입 현황을 판단하는 방식 역시 그 흐름을 따르고 있다. 각 보험사와 보험대리점 또는 보장분석 프로그램 제공사가 내놓는 결과값은 이제 상담의 표준처럼 활용되며, 클릭 몇 번이면 부족한 담보와 과다한 특약, 예상 진단비와 보완 항목이 그래프와 점수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하지만 빠르다는 것이 언제나 정확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효율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고객의 자산에 이롭다는 의미도 아니다. 필자는 지금도 세밀한 상담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보험증권 사본을 요청한다. 보험은 표면의 숫자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과 시대적 조건을 품고 있는 약속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보험증권에는 단순한 가입 내역 이상의 정보가 숨어 있다. 가입 시점이 언제인지, 당시의 예정이율과 상품 구조는 어땠는지, 지금은 사라진 유리한 담보가 들어 있는지, 갱신형과 비갱신형의 비중은 적절한지, 이미 납입이 끝나 유지비용 없이 보장만 남은 계약인지까지 모두 담겨 있다.
보장분석표는 대개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계약을 평가한다. 그러나 10년 전, 20년 전에 가입한 어떤 보험은 지금 아무리 원해도 다시는 가입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경우가 많다. 점수표는 이를 부족하다고 표시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고객 가계의 버팀목이 되는 귀한 계약일 수 있다. 그래서 보험은 점수표가 아니라 시간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호기심이 생겨 필자의 보험 가입 내역을 생명보험사 네 곳, 손해보험사 여섯 곳을 통해 결과를 받아 보았다. 적지 않은 보험료를 내며 나름 꼼꼼히 설계해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느 한 곳도 “충분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어떤 곳은 암 진단비가 부족하다고 했고, 어떤 곳은 후유장해가 약하다고 했으며, 또 다른 곳은 수술비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준이 다르니 결과도 달랐다. 전문가인 필자도 쓴웃음이 나는데, 이런 결과표를 받아드는 고객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할까 싶었다.
최근 한 고객이 식중독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보험금을 청구했는데 실손의료보험 외에는 지급되는 보험금이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보험을 잘못 가입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니 보험이 틀린 것이 아니라 기대와 약속의 범위가 달랐을 뿐이었다.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모든 보험금이 지급되는 것은 아니다. 식중독 입원이라고 해서 모든 건강보험 담보가 반응하지 않는다. 어떤 특약은 수술이 있어야 하고, 어떤 담보는 중대한 질병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어떤 계약은 일정 입원일수를 넘어야 지급된다.
보험은 아프면 무조건 받는 돈이 아니다. 약속한 조건이 충족될 때 지급되는 계약이다. 이 약속의 범위를 이해하지 못하면 보험 전체를 실패한 가입으로 오해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보험을 많이 가입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험의 핵심은 양이 아니라 방향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위험이 무엇인지에 따라 설계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과 은퇴 후 삶을 준비하는 사람의 보험은 같을 수 없고, 자영업자와 직장인의 위험 구조도 다르다. 병력이 있는 사람과 건강한 사람의 선택지도 같지 않다. 그런데 보장분석표는 때때로 이렇게 다른 삶들을 하나의 잣대로 줄 세운다.
보험을 점검할 때 필요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이해다. 부족하다는 문구에 흔들려 무작정 새 상품을 추가하기보다, 먼저 내가 가진 계약이 무엇을 지켜주고 앞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납입이 거의 끝난 좋은 계약을 해지하고 새 보험으로 갈아타는 실수는 피해야 하며, 반대로 오래된 계약이라도 지금 삶과 맞지 않는다면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결국 보험 상담은 판매가 아니라 해석이어야 한다.
고객에게 필요한 것은 100점짜리 분석표가 아니다. “내 보험이 나를 어떻게 지켜주는지 알겠다”는 확신이다. 왜 가입했고 무엇을 대비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이다.
이은옥
메가 메가하나인슈본부 영업지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