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이 17일 서울에서 무역·공급망·기술 분야의 전략적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마로시 세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은 제13차 한-EU FTA 무역위원회와 제1차 통상·공급망·기술에 관한 차세대전략대화를 잇달아 열고, 양측 경제협력의 미래 방향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는 2011년 발효된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15년 차를 맞은 시점에서 열렸다. 미·중 패권 경쟁 심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대외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양측은 기존의 상품·서비스 교역 중심 협력을 넘어 경제안보와 첨단기술 분야로 확장하는 '차세대전략경제파트너십'으로 관계를 격상하기로 뜻을 모았다.
FTA 발효 이후 한-EU 교역 규모는 50% 이상 증가해 지난해 사상 최대인 1368억 달러를 기록했다. 양측 간 누적 투자액도 2868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협력 관계는 꾸준히 확대돼 왔다. 이번 회의에서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더 실질적인 협력 방안이 도출됐다.
먼저 디지털통상 분야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지난 3월 타결된 한-EU 디지털통상협정(DTA)의 최종 문안이 이번 회의를 계기로 확정됐다. 양측은 국내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문안을 마무리했으며, 협정 발효를 위한 최종 서명까지 긴밀히 소통하기로 했다. 이 협정은 한국과 EU가 글로벌 디지털 경제 질서를 선도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FTA 부속서 개정에 합의했다. 양측은 자동차 부속서(2-C-3)에 명시된 품목에 대해 국제 규정 준수 시 국내 규정 인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를 운영해 왔는데, 첨단 기술 등장에 맞춰 이 부속서를 개정하기로 한 것이다. 26개 품목은 즉시 개정 절차를 추진하고, 11개 품목은 추가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국제 기준 상호 인정 기반이 강화돼 자동차 교역이 더욱 촉진될 전망이다.
상호인정협정(MRA) 논의도 본격화됐다. 한국은 EU가 디지털·안전·환경 분야에서 주도하는 표준과 규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을 따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별 인증'과 '절차적 병목'이 불필요한 비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양측은 방송통신기자재·의약품·순환경제(포장재) 분야를 우선 대상으로 MRA 협의를 개시하기로 공식 합의했다. 협정이 구체화되면 해당 분야 우리 기업의 EU 시장 진출이 한층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K-화장품의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도 마련됐다. 최근 한국 화장품의 대EU 수출이 급격히 성장하고, 한국 기업들의 세계 최고 수준 ODM(제조자 개발생산) 역량이 EU 브랜드의 제조와 혁신에 기여하는 점을 감안해, 양측은 화장품 분야 전담 소통 채널인 '화장품 작업반'을 신설하기로 했다. 작업반은 산업부와 EU 통상총국 담당 과장을 공동 대표로 하고 관련 부처가 함께 참여해 정보 공유, 애로사항 해소, 협력 사업 등을 논의할 예정이며, 올해 하반기 첫 회의를 목표로 실무 협의를 추진한다.
주요 통상 현안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한국 측은 EU가 지난 3월 발표한 산업가속화법(IAA)에서 FTA 체결국 원산지 제품을 EU산과 동등하게 취급하기로 한 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일부 불명확한 규정에 대한 우려를 전하고 EU 측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EU가 검토 중인 철강 TRQ(관세율 할당) 조치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 측은 이 조치가 우리 철강 업계의 EU 시장 접근에 중대한 제약이 될 수 있다며, 한-EU FTA와 WTO 규범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설계돼야 하고, 향후 협상을 통해 상호 호혜적인 해결 방안을 도출하자고 당부했다.
지리적 표시(GI)와 관련해서는 한국 측이 명칭 사용 시 원산지를 명확히 표시하고 오인 가능성을 차단하는 해석 지침 수립을 제안했다.
올해 1월 본격 시행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대해서는 최근 간소화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제3국 기지불 탄소가격 관련 규정 등 핵심 하위 법령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신속한 입법을 요청했다. 아울러 배출권거래제(K-ETS)를 운영 중인 한국에 대한 이중 규제 방지와 우리 검증 기관에 대한 EU 인정 기구의 적극적인 협조도 촉구했다.
무역위원회에 이어 열린 제1차 차세대전략대화에서는 경제와 안보가 결합되는 '경제-안보 넥서스' 시대에 대응한 실질적 협력 방안이 중점 논의됐다.
핵심광물과 반도체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양측 모두 핵심광물 생산 기반이 제한적이고 공급망 의존도가 높아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는 공통 과제를 공감했으며, 실질적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고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응을 위해 전략적 소통을 넓히기로 했다.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협력 필요성에도 공감하고, AI·첨단반도체·핵심소재 분야에서 유사 입장국 간 지속적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배터리 협력도 주요 의제였다. 한국 측은 배터리가 단순한 부품을 넘어 에너지 전환과 AI 확산을 이끄는 미래 산업의 핵심 엔진이라고 강조하며, 한국 배터리 셀·소재 기업들이 EU 내 대규모 공장 투자를 통해 EU의 첨단 배터리 생산 역량 강화와 공급망 구축, 현지 고용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EU 내 ESS(에너지 저장 시스템) 설치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의 역할 확대를 요청하고, 최근 검토 중인 산업가속화법과 관련해서도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기여도를 충분히 고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가장 주목할 점은 한국 측이 '한-EU 차세대전략경제파트너십' 논의를 공식 제안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무역 협의를 넘어 경제안보 전반을 포괄하는 프레임워크로, 양측의 다양한 부처가 참여하는 협력 체계를 의미한다. 양측은 이 이니셔티브를 주요 계기를 통해 출범하기로 합의하고,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한-EU 협력이 전통적 무역·통상을 넘어 경제안보·공급망·첨단기술 분야 등의 차세대 전략적 파트너로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향후 고위급 및 실무 협의 채널을 적극 활용해 우리 기업의 EU 시장 내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자유롭고 공정한 통상 환경 조성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