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이 기존 자유무역협정(FTA)을 넘어 공급망과 경제안보를 중심으로 한 ‘차세대전략경제파트너십’으로 협력 관계를 격상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4월 17일 서울에서 마로시 세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과 만나 제13차 한-EU FTA 무역위원회와 제1차 통상·공급망·기술에 관한 차세대전략대화를 잇달아 개최했다.
이번 회의는 2011년 발효된 한-EU FTA가 15년 차를 맞아 그간의 성과를 점검하는 한편, 미·중 패권 경쟁 심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급변하는 경제 안보 환경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마련됐다. 양측은 전통적 무역 협력을 넘어 핵심광물, 첨단기술, 공급망 분야로 협력의 폭을 넓히기로 뜻을 모았다.
이날 무역위원회에서는 크게 네 가지 분야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왔다. 우선 한국과 EU는 지난 3월 타결된 디지털통상협정(DTA)의 최종 문안을 확정했다. 디지털 경제와 통상 질서를 선도할 이 협정은 양측이 국내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며, 조만간 최종 서명 절차를 거칠 예정이다.
둘째, 자동차 분야의 핵심 규정인 ‘자동차 부속서’ 개정에 합의했다. 이 부속서는 국제 규정을 준수한 자동차 부품에 대해 한국과 EU가 각각의 국내 인증을 면제해 주는 ‘상호인정’ 제도의 근간이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등 첨단기술이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양측은 26개 품목에 대해 즉시 개정 절차를 추진하고, 11개 품목은 추가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국 자동차 업계의 EU 시장 접근이 한층 수월해질 전망이다.
셋째, 방송통신기자재·의약품·포장재 세 분야에서 상호인정협정(MRA) 협의를 공식 개시하기로 했다. 그동안 EU의 엄격한 인증 절차로 인해 발생하던 ‘지역별 인증’과 ‘절차적 병목’이 한국 기업의 불필요한 비용 부담으로 작용해 왔는데, 이번 협의가 구체화되면 해당 분야 기업들의 EU 시장 진출 장벽이 크게 낮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넷째, ‘K-화장품’의 유럽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화장품 작업반을 신설하기로 했다. 최근 한국 화장품의 EU 수출이 급성장하고, 국내 OD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들이 글로벌 혁신을 주도하는 점을 고려해, 앞으로 정기적인 소통 채널을 통해 애로사항 해소와 교역 촉진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올해 하반기 첫 회의를 목표로 실무 협의가 진행된다.
주요 통상 현안에 대해서도 양측이 의견을 교환했다. 한국 측은 EU의 산업가속화법(IAA)에서 FTA 체결국 원산지 제품을 EU산과 동등하게 취급하기로 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일부 불명확한 규정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고 보다 협력적인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되도록 당부했다.
EU가 검토 중인 철강 TRQ(관세율쿼터) 조치에 대해서는 한국 측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우리 철강 업계의 시장 접근이 심각하게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WTO 규범에 부합하고 상호 호혜적인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긴밀히 협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리적 표시(GI) 보호 문제와 관련해서는 원산지를 명확히 표시하고 소비자 오인을 방지하는 해석 지침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대해서는 최근 제도 간소화 조치를 환영하면서도, 핵심 하위법령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신속한 입법과 한국 배출권거래제(K-ETS)에 대한 이중 규제 방지를 촉구했다.
무역위원회에 이어 열린 제1차 차세대전략대화는 지난해 12월 양측이 신설에 합의한 장관급 협의체로, 경제와 안보가 결합하는 ‘경제-안보 넥서스’ 시대에 맞춰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첫 번째 의제인 핵심광물과 반도체 분야에서는 양측이 생산 기반이 제한적이고 공급망 의존도가 높다는 공통 과제에 공감하며, 실질적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고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공조하기로 했다. 특히 AI, 첨단반도체, 핵심소재 분야에서 유사 입장국 간 협력을 지속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배터리 협력에 대해 한국 측은 우리 기업들이 EU 내 대규모 공장 투자를 통해 현지 배터리 생산 역량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배터리를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전략 물자로 보고, EU 내 에너지저장장치(ESS) 프로젝트에 신뢰할 수 있는 한국 기업의 역할 확대를 요청했다. 또한 산업가속화법과 관련해 한국 배터리 기업의 기여도를 충분히 반영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여한구 본부장이 공식 제안한 ‘(가칭)한-EU 차세대전략경제파트너십’에 양측이 합의한 점이다. 단순한 무역 협의를 넘어 경제안보 전반을 포괄하는 이 새로운 협력 프레임워크는 다양한 부처가 함께 참여할 예정이며, 향후 주요 국제회의 계기를 통해 공식 출범하기로 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한-EU 협력이 전통적 무역·통상을 넘어 경제안보·공급망·첨단기술 분야의 차세대 전략적 파트너로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앞으로도 고위급·실무 협의 채널을 적극 활용해 우리 기업의 EU 시장 내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자유롭고 공정한 통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