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이 공급망과 경제안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협력 체계로 도약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4월 17일 서울에서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마로시 세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이 함께 제13차 한-EU FTA 무역위원회와 제1차 통상·공급망·기술에 관한 차세대전략대화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는 발효 15년 차를 맞는 한-EU FTA의 성과를 점검하는 동시에, 미·중 경쟁 심화와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됐다. 양측은 협력 범위를 핵심광물·첨단기술·공급망을 포괄하는 '차세대전략파트너십'으로 격상하기로 뜻을 모았다.
제13차 무역위원회에서는 FTA 발효 이후 양국 교역 규모가 발효 이전보다 약 50% 이상 증가해 지난해 상품 교역액이 역대 최대인 1368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상호간 누적투자도 2868억 달러에 달하는 등 호혜적 협력 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는 디지털통상협정(DTA) 최종 문안을 확정한 점이 주요 성과로 꼽힌다. 지난 3월 타결된 디지털통상협정은 한국과 EU가 글로벌 디지털 경제 통상 질서를 선도하고 디지털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이정표다. 양측은 협정 발효를 위한 최종 서명까지 긴밀한 소통과 협력을 이어가기로 했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부속서 개정에 합의했다. 한-EU FTA는 자동차 부속서(2-C-3)에 명시된 품목에 대해 국제규정 준수 인증을 받으면 국내규정 인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를 운영해 왔다. 이번 합의에 따라 26개 품목은 즉시 개정 절차를 추진하고, 11개 품목에 대해서는 추가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국제기준 상호 인정 기반이 강화돼 자동차 산업 전반의 교역이 더욱 촉진될 전망이다.
또한 양측은 상호인정협정(MRA)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한국은 EU가 주도하는 표준과 규제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을 따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별 인증과 절차적 병목이 교역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비용임을 강조했다. 이에 방송통신기자재·의약품·순환경제(포장재) 분야를 우선 대상으로 상호인정협정 협의를 시작하기로 공식 합의했다. 상호인정협정이 구체화되면 해당 분야 우리 기업들의 EU 시장 진출이 한층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K-화장품의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도 마련됐다. 양측은 화장품산업이 최근 교역·투자의 핵심 분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데 공감하고, 화장품 분야 애로사항 해소와 교역·투자 촉진을 위한 전담 소통채널로 화장품작업반을 신설하기로 했다. 작업반은 산업부와 EU 통상총국의 담당 과장을 수석 대표로 관련 부처가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운영되며, 정보 공유와 협력 사업 등이 포괄적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올해 하반기 첫 회의 개최를 목표로 실무 협의를 추진한다.
주요 통상현안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한국 측은 EU의 산업가속화법(IAA)에 대해 FTA 체결국 원산지 제품을 EU산과 동등하게 취급하기로 한 결정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일부 불명확한 규정이 남아 있어 우려가 해소될 수 있도록 EU 측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철강 분야에서는 EU가 검토 중인 새로운 철강 법안(TRQ 조치)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 측은 이 조치가 우리 철강 업계의 EU 시장 접근에 중대한 제약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한-EU FTA와 WTO 규범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설계돼 우리 기업의 시장 접근을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도록 신중히 검토해 줄 것을 당부했다.
지리적 표시(GI)와 관련해서는 원산지 표시의 명확성과 오인 가능성 차단 등을 반영한 해석지침 수립을 제안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대해서는 최근 제도 간소화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핵심 하위법령이 여전히 미공개된 점을 지적하고 신속한 입법을 요청했다. 또한 배출권거래제(K-ETS)를 운영 중인 우리나라에 대한 이중 규제 방지와 검증기관에 대한 EU 인정기구의 적극적인 협조를 촉구했다.
무역위원회에 이어 열린 제1차 차세대전략대화는 지난해 12월 여한구 본부장의 브뤼셀 방문 계기에 양측이 합의해 신설한 장관급 전략 협의체다. 이번 회의에서는 경제와 안보가 결합되는 '경제-안보 넥서스' 시대에 대응한 실질적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핵심광물과 반도체 분야에서는 양측 모두 생산 기반이 제한적이고 공급망 의존도가 높아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는 공통 과제에 공감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고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응을 위해 전략적 소통을 넓히기로 했다.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협력 필요성에도 공감하고, AI·첨단반도체·핵심소재 분야에서 유사 입장국 간 지속적인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배터리 분야에서 우리 측은 한국의 배터리 셀·소재 기업들이 EU 내 대규모 공장 투자를 통해 EU의 첨단 배터리 생산 역량 강화와 공급망 구축, 현지 고용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배터리는 에너지 안보와 직결되는 핵심 전략물자인 만큼 EU 내 ESS 설치 프로젝트에 신뢰할 수 있는 한국 기업의 역할 확대를 요청했으며, 산업가속화법 관련해서도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기여도를 충분히 고려해 줄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우리 측은 무역 협의를 넘어 경제안보 전반을 포괄하는 '(가칭)한-EU 차세대전략경제파트너십' 논의를 공식 제안했다. 이 이니셔티브는 단일 부처를 넘어 양측 다양한 부처 관계자가 참여하는 협력 프레임워크로 의미가 있다. 양측은 긴밀한 협력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고 강력한 이행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향후 주요 계기를 통해 이니셔티브를 출범하기로 합의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한-EU 협력이 전통적 무역·통상을 넘어 경제안보·공급망·첨단기술 분야의 차세대 전략적 파트너로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고위급 및 실무 협의 채널을 적극 활용해 우리 기업의 EU 시장 내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자유롭고 공정한 통상 환경 조성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