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보험업계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첨단 서비스를 선보이며 시장을 주도해 왔다. 모바일을 통한 보험 가입, 실시간 보험금 청구, 자동 심사 시스템 등은 이미 일상화된 지 오래이며, 삼성화재와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주요사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심사·상담·사기 탐지 시스템을 구축하며 기술 리더십을 과시해왔다. 특히 삼성화재는 건강 데이터를 기반으로 리스크를 분석하고, 현대해상과 삼성생명은 생성형 AI를 업무 전반에 접목하는 등 디지털 전환의 깊이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시스템 복잡성과 엄격한 규제 환경이 새로운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기존에 구축된 대규모 디지털 구조는 유연성이 떨어져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느리고, 사소한 기술 도입이라도 전체 시스템 재검토가 요구되는 구조다. 금융당국의 내부망 분리 정책 또한 클라우드 기반 AI나 오픈소스 도입을 어렵게 하며 R&D 속도를 제약해왔다. 업계 일각에서는 “완벽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역설”이라며 체질 개선의 시급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글로벌 보험시장은 AI를 핵심 축으로 소비자 경험을 전면 재설계하고 있다. 미국의 디지털 보험사 레모네이드(Lemonade)는 인공지능을 단순 도구가 아닌 사업 전략의 중심에 두며, 계약 체결부터 보험금 지급까지 전 과정을 자동화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다시 알고리즘 고도화에 투입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이처럼 데이터와 AI가 결합된 생태계는 시간이 갈수록 경쟁력을 더욱 격차를 벌리며, 한국 보험사들이 장기적으로 뒤처질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여전히 한국 보험사는 높은 수준의 리스크 관리 역량과 정교한 상품 설계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주목받는 존재다. 대표적으로 DB손해보험은 2025년 미국 특화보험사 포테그라 인수를 추진하며 해외 진출 본격화에 나서고 있으며, 이는 저성장 구조 속에서 새로운 수익 창출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해석된다. 국내 시장의 기술 인프라를 글로벌 무대로 확장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된 셈이다.
결국 향후 성패는 기술 자체가 아닌 변화의 속도와 실행력에 달려 있다. 규제 완화와 함께 안전한 개방형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본격화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 신호다. 과거 IT 강국의 위상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기존 체계의 안정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방과 혁신을 연결하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