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전쟁의 상흔에 심은 생명의 약속

전시 전쟁의 상흔에 심은 생명의 약속
세계인의 터전인 지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계화가 촉발한 문명 발전은 생태 균형을 흔들고, 국가 간 전쟁과 분단은 또 다른 경계 구역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은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할까. 그 지향점을 공유하는 공동체 범위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최재은 작가의 개인전 ‘약속(Where Beings Be)’은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최재은(1953~)은 조각·영상·설치·건축 등 다양한 매체와 영역을 넘나들며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다층적인 시공간에서 탐구해 온 작가다. 전시명 ‘약속’은 문명 이전부터 이어져 온 자연의 상호 연대성을 되새기게 하는 개념으로 제시되며, 작가는 이를 ‘공생지약(共生之約, 함께 살아가기로 한 맹세)’이라 표현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사유의 중심에 놓는다.
전시의 영어 제목은 ‘존재들(생명체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직역된다. 이는 ‘약속’과 나란히 놓여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장소에 어떤 약속이 내포돼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세계와 그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연상하게 하는 장치로 읽힌다.
전시는 거대한 조형물 ‘루시(Lucy)’에서 시작된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약 320만 년 전의 화석으로, 당시 최초의 인류로 추정됐던 존재다. 작가는 이 화석에서 영감을 받아 히말라야산 한백옥돌을 허니컴(벌집 모양의 육각형) 구조로 절단하고 결합해 작품을 제작했으며, 작품을 둘러싼 자작나무 구조물은 인간만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이 긴 시간 함께해 온 거처임을 암시한다.
전시 후반부 ‘자연국가’ 섹션은 철원 비무장지대(DMZ)의 생태 환경을 분석하고 훼손된 맨땅에 적합한 식재를 심어 생태 숲을 회복하는 구상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국가’ 프로젝트의 구체적 매뉴얼과 함께 종자볼(Seed Bomb)에 사용되는 씨앗 40여 종이 소개된다. 관람객은 작가의 웹사이트에 접속해 지도를 확인하고 원하는 지역에 종자볼 기부를 약정할 수 있다. 작가는 “한때 전쟁터였고 지금도 그 역사에 머물러 있는 DMZ의 땅 위에서는 역설적으로 수많은 생명체가 삶을 이어가고 있다”며 “자연의 주권에 대한 존중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전시는 ‘루시’, ‘경종(警鐘)’, ‘소우주’, ‘미명(微名)’, ‘자연국가’ 등 다섯 개 섹션이 순서대로 이어지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아카이브 섹션으로 막을 내린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실에서 4월 5일까지 열리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토·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오후 8시까지, 금요일은 오후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도슨트 투어는 매일 오후 1시 1층 전시장 입구에서 진행된다.
전시명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
참여작가 최재은
기간 2025. 12. 23 ~ 2026. 04. 05
장소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61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