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연금, IRP 거쳐도 ‘일시금 쏠림’ 여전
퇴직연금이 노후소득 보장 장치로 설계됐지만 실제 수급 단계에서는 여전히 일시금 선택이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급여를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로 이전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됐지만, 계좌 해지를 통한 일시금 수령이 가능하고 평균 적립금 규모도 작아 연금 수령으로 이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5년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60만1000좌 가운데 50만2000좌는 일시금을 선택했다. 전체 수급 개시자의 83.5%가 일시금을 받았고, 연금 수령자는 9만9000명으로 16.5%에 그쳤다.
연금 수령자 가운데서도 장기 수령은 제한적이었다. 2025년 기준 연금 수령자의 17.5%는 5년 이하, 64.3%는 5년 초과 10년 이하 기간을 선택했다. 10년 이하 수령자가 전체의 81.8%를 차지한 반면, 20년을 초과해 연금을 받는 비중은 2.3%에 불과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통계상 연금 수령으로 잡히더라도 실제로는 장기간 노후생활비를 보장하는 구조라기보다 일정 기간 나눠 받는 분할 인출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며 “퇴직연금이 평생소득 기능을 하려면 수급 방식의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시금 선택이 많은 가장 큰 이유로는 낮은 적립금 규모가 꼽힌다. 2025년 일시금 수령 계좌의 평균 수령액은 1833만원이었다. 이를 10년에 나눠 받으면 월 15만원 수준에 그치는 만큼, 가입자 입장에서는 연금으로 나눠 받는 실익이 크지 않아 일시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자본시장연구원은 퇴직연금이 연금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원인으로 이직 과정의 IRP 해지, 주택 구입과 임차보증금 마련을 위한 중도인출, 소액 적립금 문제 등을 지적했다. 퇴직 전부터 적립금이 누수되면서 수급 시점에는 연금화할 만큼 충분한 자산이 남지 않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현행 제도상 퇴직급여는 원칙적으로 IRP 계좌로 이전된다. 그러나 IRP 이전은 연금 수령을 의무화하는 장치가 아니다. 가입자는 계좌를 해지해 일시금으로 받을 수 있어 퇴직연금이 노후소득 재원보다는 퇴직 직후 현금성 자금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금융당국도 신탁형 퇴직연금의 연금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신탁형 퇴직연금의 경우 종신연금 가입이 제한되고 일부 사업자는 연금 수령기간을 최대 20년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20년 초과 장기 수령과 종신형 상품 선택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세제 유인이 실제 연금화 확대와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6년부터 이연퇴직소득을 연금으로 수령할 경우 실제 연금수령기간이 20년을 초과하면 퇴직소득세 부담이 추가로 낮아진다. 그러나 장기 수령 상품과 선택지가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세제 혜택이 실제 연금화 확대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의 핵심은 적립 단계의 수익률 경쟁만이 아니라 은퇴 이후 현금흐름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설계하느냐에 있다”며 “사업자별 연금 수령률, 평균 수령기간, 장기연금 전환율 같은 지급 단계 지표를 더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의 연금화를 높이기 위해서는 수급 단계의 기본값을 연금 중심으로 바꾸고, 소액 적립금의 일시금 유인을 줄이는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IRP 계좌로 이전하도록 하는 방식만으로는 퇴직연금이 노후소득으로 정착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