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에 묶인 헬스케어 산업… 입법 재시동
보험업계를 비롯한 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이 인공지능(AI)과 데이터를 활용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제도는 여전히 산업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의료행위와 개인정보 활용 기준이 여러 법률에 흩어져 있어 산업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국내 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은 의료법과 개인정보 보호법,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약사법, 디지털의료제품법 등 개별 법률을 근거로 운영된다. 의료행위와 개인정보, 연구윤리, 의료기기 등을 각각 규율하고 있지만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기준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이 때문에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할 때마다 여러 법률을 동시에 검토하거나 규제 샌드박스, 정부 유권해석 등에 의존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보험업계도 이러한 한계를 체감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전통적인 보험시장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보험사들은 건강관리와 예방 중심의 헬스케어 서비스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지만, 현재 서비스는 운동이나 식습관 관리 등 비의료 영역에 대부분 머물러 있다.
질병 예측이나 건강 위험도 분석 서비스는 의료적 판단인 ‘진단’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어 무면허 의료행위 논란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법상 규제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사업 확대에도 제약이 따른다. 의료정보 활용 역시 민감정보 규제와 데이터 활용 제한으로 AI 기반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이러한 제약의 완화와 산업 성장을 위해 디지털헬스케어 관련 입법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2024년 10월 안상훈 국민의힘 의원이 ‘디지털헬스케어 진흥 및 보건의료데이터 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데 이어, 2025년 11월에는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디지털 헬스케어 및 보건의료정보 활용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다만 개인정보 보호와 의료정보 활용 범위 등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면서 입법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디지털 헬스케어 및 보건의료정보 활용 지원에 관한 법률(디지털 헬스케어 진흥법)’을 다시 대표 발의하며 입법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번 법안은 그동안 가이드라인과 규제 샌드박스에 의존했던 ‘비의료 디지털헬스케어 서비스’를 법률상 정의하고, ‘사망자 보건의료정보’를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보건의료정보 ‘2차 활용’ 지원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은날 열린 ‘디지털 헬스케어 진흥 및 보건의료데이터 활용 관련 입법 방향 국회 세미나’에서도 산업계는 기술 발전 속도에 비해 제도 정비가 뒤처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박대웅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수석 연구원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데이터와 정보통신기술(ICT) 역량을 갖추고도 법률 간 적용 관계가 불명확하고 가이드라인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산업 발전에 한계가 있다”며 “데이터 2차 활용, 사망자 보건의료정보 활용, 비의료 디지털헬스케어 서비스 등을 명확히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도형호 HL7 Korea(한국의료정보표준화기구) 운영위원장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지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라며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확보와 활용이 제도적으로 어렵고, 기업들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을 소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칠승 의원은 “법은 혁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안전한 데이터 활용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 연구자와 기업이 안심하고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혁신의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