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흡의 종횡무진 세계사] 한국의 서민금융 600년의 풍경 ③ — 8·3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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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은 수출과 공업화를 앞세워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자본만 있으면 돈을 번다는 인식 속에 너도나도 자금을 끌어다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자를 감당할 능력은 뒷전이었다. 빚에 무너진 것은 기업만이 아니라 수많은 자영업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자본이 빈약한 기업에게 성장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었다. 차관과 은행 대출만으로는 폭증하는 투자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 격차를 메운 것이 고리(高利)의 사채였다. 1970년대 초 기업이 떠안은 사채의 가중평균 금리는 월 3.84%, 연 46%에 달했다. 1971년 말 부채비율은 약 400%까지 치솟았고, 환율 절상과 차관 상환 부담까지 겹친 1972년 상반기에는 경기하강의 징후마저 나타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연쇄 도산을 경고할 만큼, 사채는 끝내 나라의 성장 엔진마저 멈춰 세울 기세였다. 막다른 골목에서 정부는 누구도 예상 못한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군사정부다운 발상이었다. 1972년 8월 3일 정부는 헌법상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15호’를 선포했다. 모든 기업이 보유한 사채를 신고하게 한 뒤 일괄 동결하고, 신고된 사채는 연 16%, 3년 거치·5년 분할상환의 새로운 채권·채무 관계로 강제 전환했다. 사채 이자 부담은 단숨에 3분의 1로 줄었다. 이렇게 동결된 사채 규모가 약 3500억원으로, 당시 국내 신용 규모의 약 30%에 달했다. 자유시장경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례 없는 초법적 조치였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기업의 부채비율은 1971년 400%에서 1973년 270%로 빠르게 낮아졌고, 그해 경제성장률은 15%에 이르렀다. 이 체력을 발판으로 한국 경제는 중화학공업화로 나아가 이듬해의 1차 오일쇼크를 버텨냈다. 그러나 빛에는 그늘이 따랐다. 동결의 부담을 짊어진 것은 돈을 빌려준 사채권자였고, 그중에는 평생 모은 돈을 굴리던 서민 채권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사채는 오늘날로 치면 저축과 퇴직금을 펀드에 맡긴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평범한 노후 자금이 하루아침에 묶이고 깎였다. 이 조치는 또한 “빚을 많이 져도 사업을 키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그릇된 학습을 남겼다. 부실 대기업마저 국가가 구제하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첫 사례로, 그 과잉투자 관행은 훗날 외환위기의 먼 전조가 됐다. 8·3 조치의 본질은, 신용의 ‘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곪아버린 문제를 군사정부의 총칼로 일거에 눌러버린 데 있다. 담보도 안전망도 없이 오직 자기 돈을 거는 사채의 높은 금리는, 제도권 공금융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 관행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험의 가격’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 가격을 강제로 3분의 1까지 깎아내렸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끝내 한 가지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빌려준 이는 누구이며, 그 돈은 어떤 돈이었는가. 이 물음을 묻지 않은 채 채무를 일괄 동결함으로써, 국가는 빌린 쪽(기업)을 살리고 빌려준 쪽, 곧 서민 채권자만을 희생시켰다. 이 어긋난 인식은 이후로도 오래 이어졌다. 제도권 공금융이 정상화된 뒤에도 제도권 사금융은 불법사금융과 한데 묶여 부정적 시선을 받았고, 정작 불법사금융의 근본적 해악이 무엇인지는 끝내 가려지지 않은 채 셋의 경계는 흐릿하게 흘러갔다. 약 30년 뒤 국가는 또 다른 목적으로 신용 제도를 끌어다 썼다. 외환위기를 넘기고 자영업자와 전문직의 소득이 불어나면서 마침내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자, 정부는 복지와 재정에 충당할 재원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 소득을 포착할 징세 기술을 가다듬는 대신, 가장 손쉬운 길을 택했다. 내수 회복과 소득 양성화라는 명분 아래, 그 수단으로 신용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사용액 소득공제라는 그럴듯한 미끼를 내걸고, 현금서비스 한도와 길거리 모집 제한을 잇따라 풀었다. 빗장이 풀리자 카드사들의 영업 경쟁에 불이 붙었다. 서민에 대한 대출 심사는 거의 불필요하다시피 했다. 카드사들은 상환 능력도 확인하지 않은 채 서명만 받고 카드를 내주었고, 급기야 고등학생에게까지 발급했다. 2002년 카드는 1억장을 넘어섰고, 이용 실적은 3년 만에 7배로 부풀었다. 그러다 돌려막기의 사슬이 끊기자 둑이 터졌다. LG카드는 채권단 공동관리로 넘어갔고, 2003년 신용불량자는 372만명, 그 중 60%가 카드 관련이었다. 자살률과 범죄율이 동반 상승했으며, 이 그늘은 실물경제로 번져 끝내 경기를 침체로 끌어내렸다. 카드대란의 본질 역시 신용의 ‘양’에 있었다. 대상을 정의하지 못한 정책은 성과를 공급의 양에서 찾기 마련이다. 누구의 손에 카드를 쥐여줄지 묻지 않은 채 발급 자체가 목표가 되자, 척도는 발급 장수와 이용액으로 굳었다. 8·3이 양을 강제로 눌렀다면, 카드대란은 둑이 터지도록 풀었다. 방향은 정반대였으나 발상은 하나였다. 8·3과 카드대란은 30년의 간격과 정반대의 방향을 사이에 두었지만, 같은 실패의 두 얼굴이다. 한쪽은 빚을 얼렸고 한쪽은 빚을 쏟아부었으나, 둘 다 본질을 설계하는 대신 눈앞의 목적만 좇았다. 더 깊은 곳에서 둘은 똑같이 ‘누구’를 비워두었다. 8·3은 빌려준 이를, 카드대란은 빌리는 이를 끝내 묻지 않았다. ‘서민은 누구인가’를 두 번 다 건너뛴 것이다. 그 대가는 언제나 가장 약한 쪽, 곧 서민 채권자와 신용불량자가 치렀다. 신용은 양으로 조절하는 손잡이가 아니라, 위험을 가려 값을 매기고 그것이 누구에게 흐를지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 설계를 미룬 채 양만 누르고 푼 두 번의 실험은 같은 물음을 남긴다. 누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신용을 설계할 것인가. 그리고 그 신용에 내재한 위험은 누가 짊어졌는가. ​​대한민국 보험과 은행, 금융을 읽는 [한국보험신문]

출처: 한국보험신문 ✓ 협약 승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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