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적립금 규모가 500조원을 넘어섰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25 퇴직연금 투자백서’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14.8%에 달할 정도로 금융권 전체에서 손꼽히는 고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업권별로 희비가 엇갈리면서 보험업계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2025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은행이 260조5000억원(52.0%)으로 가장 많았고, 증권(131조5000억원, 26.2%)과 보험(104조7000억원, 20.9%)이 뒤를 이었다. 10년간 성장률을 살펴보면 은행과 증권이 각각 15.2%, 19.6%를 기록한 반면 보험은 10.1%에 그쳤다. 과거 퇴직보험 및 종업원퇴직적립보험 시절 시장을 주도했던 보험업계의 위상을 고려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가장 큰 원인은 시장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DB형(확정급여형) 비중이 2023년 53.7%에서 2025년 말 45.7%로 축소된 반면, DC형(확정기여형)과 IRP(개인형퇴직연금)는 각각 28.2%, 26.1%로 확대됐다. 적립금 운용 방식에서도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같은 기간 87.2%에서 75.4%로 줄고 실적배당형이 24.6%까지 늘어나는 등 장기 투자 자산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보험사는 여전히 기업 대상 원리금보장형 상품 판매사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하면서 경쟁에서 뒤처졌다. K-ICS(신지급여력제도) 체계 아래에서 퇴직연금 사업 확대가 자본 효율성을 높이지 못한다는 내부 한계도 발목을 잡았다. 박준범 성균관대 겸임교수(한국은퇴연금아카데미 대표)는 “이제 퇴직연금은 보험(Insurance)이 아닌 연금 금융(Pension Finance)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보험사가 살아남으려면 연금 전문회사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보험사가 가입자 중심의 투자 컨설팅 역량과 자산 운용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시장 영향력이 더욱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퇴직연금을 은행·보험·증권의 부수 사업이 아닌 독립된 전문 금융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