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성장펀드가 첨단산업의 투자 리스크를 분담하며 생산적 분야로의 자금 공급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5월 28일 열린 국민성장펀드 기금운용심의회에서 국산 AI 반도체 개발, AI 데이터센터 건설, 차세대 백신 개발 등 총 5건의 사업에 대해 4조 1,400억원 규모의 자금 지원을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승인은 지난 4월 14일 발표된 2차 메가프로젝트의 구체적 실행 방안으로, AI 반도체, 바이오, 이차전지 등 국가 첨단전략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국민성장펀드는 직접 지분투자, 인프라 투융자, 저리 대출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업의 성장 단계별로 맞춤형 자금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규모의 지원은 인공지능 반도체 분야에서 이뤄졌습니다. 국민성장펀드는 국내 AI 반도체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인 퓨리오사AI에 약 8,000억원 규모의 직접 지분투자를 결정했습니다. 이 중 첨단전략산업기금에서 3,700억원을 출자하고, 산업은행 본체 300억원, 네이버와 한국투자파트너스 등 민간 투자자들이 나머지 4,000억원을 조달할 예정입니다.
퓨리오사AI는 지난 1월 2세대 인공지능 반도체(NPU, 신경망처리장치) '레니게이드'의 양산을 시작한 기업입니다. 이번 투자금은 레니게이드의 생산 확대와 함께, 2나노 공정과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4)를 활용한 3세대 NPU(가칭 '스토크') 개발에 사용됩니다. NPU는 인간의 뇌처럼 방대한 AI 연산을 병렬로 처리하도록 설계된 반도체로, AI 시대의 핵심 부품으로 꼽힙니다.
퓨리오사AI는 독자 개발한 '텐서 수축 기술(Tensor Contraction)'을 통해 데이터 처리 효율을 크게 개선했습니다. AI 모델은 사용자 입력값을 행렬(Tensor)로 인식해 연산하는데, 이 회사의 NPU는 행렬을 작은 단위의 슬라이스(Slice)로 나누어 연산량을 줄이고 전력 소비를 낮췄습니다. 이러한 기술력은 국내 AI 반도체 기업 최초로 글로벌 반도체 최고 권위 컨퍼런스 '핫 칩스(Hot Chips) 2024'에서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AI 반도체 시장은 2024년 818억 달러에서 2029년 3,902억 달러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향후 AI 서비스 확대로 학습 영역보다 추론 영역의 반도체 수요가 더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아직 추론용 AI 반도체 시장은 절대적 강자가 없는 상황입니다. 국민성장펀드는 퓨리오사AI가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 불리는 양산 단계의 자금난을 극복하고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AI 인프라 분야에서는 국내 3위 게임회사(영업이익 기준)인 스마일게이트그룹이 경기도 고양시에 건설하는 AI 데이터센터 2곳에 인프라 투융자 방식으로 지원합니다. 첨단전략산업기금이 지분투자 2,500억원과 후순위대출 2,500억원 등 총 5,000억원을 투입하고, 산업은행 등이 선순위대출 1조 9,200억원을 제공해 총 사업 규모는 2조 8,000억원에 달합니다.
각 데이터센터는 IT 부하 50MW 규모로, 총 100MW(약 GPU 3만장 이상)의 컴퓨팅 파워를 갖추게 됩니다. 스마일게이트는 전체 용량의 35%를 자체 사용해 대표 게임 '로스트아크'에 AI 기술을 도입할 계획이며, 나머지 공간은 자체 데이터센터 구축이 어려운 국내 중소·중견 게임사 등에 임대할 예정입니다. 이미 약 20여개 사가 임차 의향서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이 데이터센터는 AI 인프라 핵심 설비의 국산화에도 의의가 있습니다. 공조, 전력, 자동제어 등 주요 장비의 국산화율을 기존 20~30%에서 약 51.2%로 끌어올려,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외산 장비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기업의 제품 실증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SK바이오사이언스가 개발 중인 '21가 폐렴구균 백신'의 상업화를 위해 3,000억원 규모의 저리 대출이 승인됐습니다. 이 중 첨단기금이 2,500억원, 산업은행이 500억원을 각각 부담합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프랑스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Sanofi)와 함께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며, 이번 자금으로 경북 안동에 국내 최대 규모의 백신 생산 공장을 증설하고 최신 장비를 도입할 계획입니다.
폐렴구균 백신은 코로나19 백신을 제외한 글로벌 백신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로, 2025년 약 12조원에서 2030년 17조원 이상으로 성장할 전망입니다. 현재 이 시장은 미국의 화이자(Pfizer)와 머크(MSD) 등이 과점하고 있는데, SK바이오사이언스가 개발 중인 21가 백신은 기존 15가·20가 백신보다 더 많은 혈청형(세균 유형)을 예방할 수 있는 프리미엄 제품입니다. 상용화에 성공하면 국내 백신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백신 수출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시행되는 21종의 국가예방접종(NIP) 백신 중 국내 자급이 가능한 것은 6종에 불과하며, 폐렴구균 백신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차전지 분야에서는 코스피 상장사 엘앤에프의 자회사인 엘앤에프플러스가 대구 달성군 국가산업단지에 LFP(리튬·인산·철) 양극재 생산 공장을 구축하는 사업에 2,200억원의 저리 대출이 지원됩니다. 첨단기금이 1,700억원, 산업은행이 500억원을 담당하며, 총 사업 규모는 약 3,300억원입니다. 엘앤에프플러스는 12년 만기의 장기 저리 자금을 활용해 연간 6만 톤 규모의 LFP 양극재 양산 능력을 확보할 계획입니다.
LFP 양극재는 기존 주류였던 삼원계(NCM, 니켈·코발트·망간) 양극재에 비해 에너지 밀도는 낮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열 안정성이 뛰어납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삼원계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중저가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이 확대되면서 LFP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양극재 시장은 2023년 이미 삼원계(45%) 대비 LFP(51%)가 역전했으며, 2025년에는 LFP 비중이 60%까지 확대될 전망입니다.
이번 지원으로 엘앤에프플러스는 고압축 밀도(2.5g/cc 이상) 공법 등 신기술을 적용해 글로벌 경쟁사 대비 높은 에너지 밀도를 구현할 예정이며, 국내 이차전지 핵심 소재의 공급망 내재화와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충북 음성군 소재 중소기업 근우에는 AI 데이터센터용 배전반 생산 공장 구축을 위해 200억원의 저리 대출이 지원됩니다. 근우는 AI 데이터센터 건설 수요 급증에 따라 필요한 배전반을 설계·제조·설치하는 기업입니다. 이번 지원으로 공장을 증설하면 AI 데이터센터의 적기 구축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작년 프랑스 슈나이더사와의 라이센스 계약 이후 국내에서 제작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되어 관련 밸류체인의 수입 의존도 축소 효과도 기대됩니다.
이번 5건의 사업 승인으로 국민성장펀드는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누적 16건, 12조 5,000억원의 사업을 승인하게 됐습니다. 이 가운데 첨단전략산업기금 누적 승인액은 5조 1,700억원입니다. 국민성장펀드는 올해 초 30조원 규모의 운용 계획을 발표한 바 있으며, 직접투자 3조원, 간접투자 7조원, 인프라 투융자 10조원, 저리 대출 10조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적 금융을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