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폴트옵션 ‘자산배분’ 취지에도 안정형 쏠림은 여전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이하 디폴트옵션)가 자산배분투자 확대를 목표로 도입됐지만 실제 투자자금은 여전히 안정형 상품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 규모는 은행권 중심으로 형성됐지만 1년 수익률에서는 보험권이 소폭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디폴트옵션이 가입자의 자산배분투자를 유도하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정해둔 포트폴리오로 자동 투자되도록 하는 제도다.
지난해에는 상품명에 ‘위험’을 강조하던 표현이 합리적 투자를 저해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위험등급 명칭을 ‘투자’ 중심으로 정비했다. 이에 따라 초저위험·저위험·중위험·고위험으로 구분되던 위험등급은 각각 안정형·안정투자형·중립투자형·적극투자형으로 바뀌어 가입자가 투자성향에 맞게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2025년 디폴트옵션 비교공시(1~4분기)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디폴트옵션 상품을 운영한 보험사는 총 16곳, 은행은 11곳으로 집계됐다. 보험권은 129개, 은행권은 98개 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상품 설계 단계에서는 정책 취지에 맞는 투자형 라인업이 상당 부분 구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은행권 고유상품을 합산하면 중립투자형 비중이 약 29.5%, 안정투자형 29.1%, 적극투자형 28.2%, 안정형 13.2% 수준으로 투자형 상품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실제 가입자의 투자 행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2025년 4분기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을 보면 보험권은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84.0%, 은행권은 87.2%가 안정형에 집중됐다. 정책당국이 장기 투자와 자산배분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실제 투자금 대부분은 안정형 상품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디폴트옵션 제도가 수익률 제고를 위해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예금 등 안정형 상품이 기본 선택지에 포함되면서 투자 경험이 부족한 가입자들이 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다”고 설명했다.
시장 규모는 은행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2025년 4분기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은행권이 약 45조2000억원으로 전체의 84.7%를 차지한 반면 보험권은 약 2조6000억원으로 4.9%에 그쳤다.
보험권 내부에서도 일부 회사로 자금이 몰렸다. 삼성생명(6269억원)과 교보생명보험(5645억원)의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합산 약 1조1900억원으로 보험권 전체의 45.6%를 차지했다.
2025년 4분기 비교공시에서 상품별 1년 수익률(단순평균)은 보험권이 약 8.98%, 은행권이 약 8.80%로 유사한 수준을 기록했다. 업계에서는 상품 구조 차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은행권 상품이 상장지수펀드(ETF)와 글로벌 펀드 등 주식형 자산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보험권 상품은 타깃데이트펀드(TDF) 중심의 분산형 포트폴리오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상품 라인업은 자산배분 투자 구조로 갖춰졌지만 실제 투자금이 안정형에 편중되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며 “디폴트옵션 제도의 성과는 가입자의 투자 경향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노후자금이라는 인식이 강해 손실을 피하려는 심리로 안정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금융회사들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강점을 갖고 가입자의 안정 선호 심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상품을 권유하는 영업 구조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안정형 비중이 높은 원인이 금융회사의 상품 권유 방식에 있다면 판매 관행에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