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의 그림자, 600년을 이어온 위험의 전가

지난해 여름 캄보디아의 한 범죄단지에서 스물두 살 한국 대학생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은 단순한 참극이 아니다. 국가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해당 단지의 연간 수익이 캄보디아 국내총생산(GDP)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범죄 경제가 거대해진 배경에는 한국의 신용 시스템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 통장 하나를 팔러 갔다가 목숨을 잃은 청년의 비극은 2003년 카드대란 당시 372만명의 신용불량자가 쏟아져 나온 사건과 연결된 하나의 긴 실타래다.
카드대란의 발단은 국가의 안일한 정책 선택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불어난 소득을 정교하게 징세하는 대신 신용카드로 세원을 양성화하려 했고, 그 실행을 카드사에 맡겼다. 상환 능력을 묻지 않고 이름 석 자만으로 카드를 발급한 것은 신용을 그 실질에서 분리한 첫 번째 거래였다. 신용을 잃은 이들은 제도권 금융의 문턱 밖으로 밀려났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기 이름 석 자뿐이었다. 역설적으로 명의가 환금 수단이 되면서 불법 범죄조직이 이를 파고들었다.

시장은 정교하게 작동했다. 자산을 가진 중장년층에게는 검찰을 사칭해 직접 돈을 갈취했고, 가진 것 없는 청년에게는 이름 자체를 헐값에 사들였다. 이 시장에서 거래된 상품이 대포통장이고, 중간상 역할을 한 이들이 이른바 '장집'이었다. 위험은 가장 약한 자리로 쏠렸다. 명의를 빌려준 청년은 푼돈을 받는 대신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형사처벌과 '금융질서문란자' 등재라는 또 다른 배제를 떠안았다.
이 모든 과정은 600년 전 조선의 환곡(還穀)에서 시작된 구조적 결함의 반복이다. 환곡은 백성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시작해 수탈로 굳어졌고, 1972년 8·3 긴급경제조치는 사채 이자를 강제로 깎으며 대출자를 비워뒀다. 2003년 카드대란은 심사 없이 카드를 쏟아내며 빌리는 이를 비워뒀다. 세 사건 모두 '서민이 누구인지' 정의하지 않고 신용의 양만 조절한 실패의 역사다.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았고, 그 비용은 항상 가장 약한 자리로 굴러떨어졌다.
무너진 둑을 다시 세우는 일은 단순히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신용을 심사하는 기능을 보수해 떨어져 나간 이름을 그 사람의 실질에 다시 묶어야 한다. 얇은 이력의 청년과 노년, 자영업자, 이주민까지 통신·공과금 같은 비금융 정보로 비추는 정교한 심사가 필요하다. 공급한 양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가 제도권으로 돌아왔는지로 성과를 측정해야 한다. 위험은 그것을 만든 손이 지고, 속아 이름을 넘긴 이는 낙인이 아닌 제도권으로 돌려보내는 설계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