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우의 50’s 라이프플러스 매일, 나는 글밭을 갑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면 창밖 하늘은 어김없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하루의 무게가 천천히 어깨에서 풀려나던 그때, 문득 곽재구 시인의 문장을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이 스쳤다.
“서해에 노을이 진다. 노을은 서해의 시다.”
그 구절이 좋아 오래전에 적어두었는데, 이런 저녁이면 유독 다시 써보고 싶어지곤 했다. 어떤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편에 빛처럼 남아, 다시 꺼내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어 보았다.
“여의도 불빛은 시다. 낮 동안 남겨진 말들은 서쪽 하늘로 한 장 한 장 넘어간다. 불빛이 켜질 때마다 그 불빛은 시어가 되고, 도시의 바람은 시를 읽는다. 도시 불빛은 노을을 닮아 천천히 도시를 물들인다. 오늘의 여의도는 뉴욕보다 아름답다.”
뉴욕을 가본 적은 없지만, 어둠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여의도의 불빛은 밥벌이의 지겨움을 이겨낸 하루의 마지막 응원처럼 느껴져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삶의 순간을 눈으로 담고, 손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부끄러운 흉내를 매일 조금씩 내고 있다.
읽은 책은 씨앗이 되고, 스쳐 지나간 풍경은 흙이 되며, 어제 나눈 대화는 거름이 된다. 그 순간 글밭의 지력은 조금씩 비옥해지는 것이다. 농부가 흙을 손바닥으로 들어 올려 어젯밤 바람의 흔적을 살피고, 이랑 사이로 햇빛이 드나들 길을 열어주듯, 나 역시 단단한 생각을 뒤집고 빛을 들이며 하루를 채워간다.
며칠 후 하늘은 또다시 붉은 주홍빛으로 번졌다. 나는 흔한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트에 짧게 적었다.
“하늘은 주홍빛으로 번지고, 도시의 윤곽은 어둠 속으로 잠긴다. 유리창에 스친 빛과 먼지, 차가운 공기는 그대로 멈춰 있다. 해가 저물면, 하루의 이야기를 거름 삼아 글밭을 가는 시간. 글을 배우는 이에게는 숨이 가빠지는 시간이다. 글은 숨이다. 글로 숨을 쉴 수 있을까? 글을 쓴다는 건 마음에 피어난 생각을 낱말이라는 씨앗으로, 문장이란 땅에 심는 일. 그것은 곧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농부가 밭을 가는 일은 흙의 숨을 틔워주는 일이다. 단단해 보이는 흙을 살짝 들어 올리면 안쪽에서 더 촉촉하고 따뜻한 결이 드러난다. 글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던 생각을 뒤집으면 그 밑에 감정의 층들이 숨어 있다. 글을 쓴다는 건 그 숨겨진 내 마음의 층위를 확인하고, 바깥으로 꺼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늦가을 장모님의 텃밭에 고구마와 대추, 단감을 따러 갔다. 지난번 고구마를 캔 자리에는 벌써 마늘이 심겨 있었다. 감을 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일솜씨가 서툰 내가 못 미더우셨는지, 어머님은 일일이 가지 자르는 법, 장대로 감을 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상하리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갓 캔 고구마를 삶아 김치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데, 순간 그것은 마치 신화 속 신들이 먹고 마셨다는 ‘암브로시아’와 ‘넥타르’ 같았다. 필멸의 존재도 그것을 먹으면 불사의 몸이 된다는, 그 상징적인 기쁨이 입안에 퍼졌다. 깨끗이 씻은 단감을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는데, 그때 문득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단감처럼 늙고 싶다. 떫디떫은 날들을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단감이 된다. 늙는다는 건, 달아지는 것이다.”
그 순간 왜 그런 문장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다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마음에 일어난 생각을 붙잡고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단감처럼 늙고 싶다’는 이 직유. 누구나 삶의 고비와 상처, 실패를 조금씩 안고 살아간다. 젊은 날의 서툼과 모자람도 있다. 햇빛과 바람을 함께 품어야 단감처럼 생은 달고 단단한 결로 익어간다.
시인 박연준의 “안경처럼 늙고 싶어”라는 첫 문장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안경처럼 늙는다’는 말에는, 내 늙음이 누구의 시야도 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한 세상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겸손한 바람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투명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 말이다.
아직 글을 자유롭게 다루지 못한다. 모니터 앞에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문장 사이에 숨 가쁨도 많아 글이 덜컹댄다. 그럼에도 매일 농부의 마음으로 글밭을 갈고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일 때가 있다. 산책길에 스치는 바람과 나뭇잎이 흔들리는 작은 소리가 문장처럼 들리고, 유난히 밝은 도시 불빛이 하나의 단어처럼 느껴지며,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가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작은 글감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사소함에 귀 기울이면서 나는 비로소 진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것 같다.
여전히 서툴고 자주 막히고 덜컹거리는 글을 쓰고 있지만, 오늘도 용기 내어 담벼락에 글을 쓰고 있다. 시간이 흘러 지난날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