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이후에도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을 찾기 위한 국가 차원의 연구가 시작된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은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있지 않고 집에서 일상생활을 스스로 해내는 90세 이상 어르신들을 장기간 관찰하는 '한국인 초고령자 코호트' 구축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15일 밝혔다.
'코호트'는 특정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일정 기간 반복 조사해 건강 변화나 질병 발생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찾아내는 연구 방법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옷 입기, 식사, 화장실 사용 등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스스로 수행하는 능력이 유지되는 90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다.
국립보건연구원은 2028년까지 약 1,000명의 참여자를 모집할 계획이다. 앞서 2025년 실시한 예비조사에서는 118명의 초고령자가 참여했으며, 연구 참여 동의율은 74.2%로 나타나 현장 적용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2024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보면 90세 이상 인구는 2020년 27만 4천여 명에서 2025년 37만 4천여 명으로 5년 새 약 10만 명(36.5%) 증가했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2022~2072)에 따르면 2052년에는 90세 이상 인구가 약 20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같은 기간 70대 인구 증가율(약 2.0배)과 80대 인구 증가율(약 3.2배)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초고령 인구의 건강 관리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국가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다.
국립보건연구원은 그동안 한국인유전체역학조사사업(KoGES) 노화심층조사, 한국도시농촌어르신 연구, 노인노쇠코호트 연구 등을 통해 한국인의 건강 노화와 노쇠 위험 요인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 연구 기반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이들 연구는 주로 중장년층과 65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해 90세 이상 초고령층에 대한 데이터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번 코호트는 빠르게 늘고 있는 90세 이상 초고령층의 건강 특성, 기능 유지와 변화 등 성공적 노화의 결정 요인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초고령자 보건의료 정책 수립에 필요한 근거 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추진된다. 국가 건강노화 연구 인프라를 90세 이상 초고령층까지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해외 주요 국가들도 초고령자 장기추적 코호트를 운영해 건강 장수, 치매, 노쇠 연구 등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 미국, 중국, 호주 등은 1990년대 전후부터 초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코호트를 통해 성공적 노화와 건강 장수 관련 과학적 근거를 축적해 왔다.
코호트 기반 조사에서는 초고령자의 건강 상태와 생활습관뿐 아니라 걷기·근력, 기억력, 영양 상태, 마음 건강, 사회적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한다. 건강 노화와 관련된 생물학적 요인 분석을 위해 혈액과 소변 등 인체 자원도 수집한다. 추적 조사를 통해 90세 이후 건강 유지와 기능 저하, 돌봄 필요로 이어지는 전반적인 과정을 장기간 관찰할 계획이다.
구축된 데이터와 인체 자원은 국내 연구자와 민간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다. 초고령자의 건강 관리, 노쇠 예방, 장기 요양·통합 돌봄 등 보건의료·돌봄 정책의 과학적 근거 생산을 위한 다양한 연구에 사용될 예정이다.
예비조사 결과는 초고령자 집단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 90세 이상 초고령자 가운데 상당수는 비교적 양호한 신체 기능과 사회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노쇠, 영양 위험, 우울감, 외로움 등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체적·정신적·사회적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맞춤형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예비조사에 참여한 초고령자의 63.6%는 보행 속도, 균형, 의자에서 일어서기 등을 종합 평가한 신체 기능에서 중간 이상 수준을 보였다. 80% 이상이 종교 활동, 복지관·경로당 이용, 지역 사회 활동 등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반면 외로움 평가에서는 약 60%가 높은 수준의 외로움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시력 관련 삶의 질은 비교적 양호했지만 청력 불편을 호소하거나 객관적 저하가 확인됐다.
지역 간 차이도 주목할 만한 결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구와 강원도 평창군 거주 초고령자를 비교한 결과, 신체 기능과 기본적인 건강 수준은 지역 간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회 활동 참여, 디지털 기기 활용, 정서적 지원 체계 등 사회환경 영역에서는 차이가 관찰됐다. 스마트폰 보유율은 도시 지역이 농촌 지역보다 약 7배 높았고, 위기 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응답은 농촌 지역에서 약 3배 높았다. 농촌 지역에서는 우울 위험과 자살 생각 경험도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초고령자의 건강 노화를 위해서는 의료 서비스뿐 아니라 사회 참여 기회 확대, 디지털 접근성 향상, 정서적 지원 체계 구축 등 사회환경에 대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한 이번 예비조사에서는 음성 기반 인공지능(AI) 건강관리 기술이 초고령자에게 적용 가능한지도 살펴봤다. AI 안부전화는 95% 이상의 높은 참여율을 보였으며, 스마트폰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전화 기반 음성 응답으로 참여할 수 있어 90세 이상 초고령자 대상 비대면 건강 모니터링 수단으로 활용 가능성이 확인됐다.
AI 안부전화 응답 자료에서는 낙상이나 입원 등 건강 이벤트 발생과 이후 건강 상태 악화 양상이 관찰됐다. 수면, 식사, 외출, 사회생활, 기분, 통증 등 다양한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 향후 초고령자 비대면 건강 관리에 유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재필 국립보건연구원 미래의료연구부장은 “90세 이상 어르신의 건강 변화를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장기 추적한다는 점에서 이번 코호트는 큰 의미가 있다”며 “국립보건연구원이 오랫동안 쌓아온 코호트 구축·운영 경험을 토대로 신뢰도 높은 국가 건강노화 데이터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은 “초고령사회 대응의 핵심은 오래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을 뒷받침하는 것”이라며 “질병관리청은 건강노화와 노쇠 예방, 돌봄 부담 완화에 필요한 과학적 근거를 생산하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초고령사회 대응 정책 마련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국립보건연구원은 2026년 7월부터 참여자 모집과 본격 조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예비조사는 일부 지역과 기관 참여자 중심으로 수행된 사전 연구인 만큼, 이번 코호트 구축을 통해 대상자 규모와 지역 유형을 확대해 초고령자의 건강 변화와 사회환경적 요인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