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근의 보험맹 탈출하기 암진단을 받았는데 암이 아니라고 말하는 보험사?
암보험에 가입했는데 막상 보험금을 청구하니 “이건 보장 대상이 아닙니다”라는 답변을 받는다면 억울하겠지만, 포기하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보험 가입 당시의 질병분류 기준이다.
우리나라에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 KCD(Korean Standard Classification of Diseases)라고 부르는 이 기준은 모든 질병과 사망원인을 체계적으로 분류해놓은 국가 공식 기준으로, 쉽게 말해 질병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험회사들은 이 KCD를 기준으로 어떤 질병이 보험금 지급 대상인지를 판단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KCD는 고정불변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학이 발전하고 질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몇 년마다 한 번씩 개정되는데, 마치 법이 시대에 맞춰 개정되는 것과 비슷하다. 2009년에는 5차 개정안이 적용됐고 현재는 2021년에 나온 8차 개정안이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특정 질병의 분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로 상피성 유두종’이라는 질병이 있다. 요로 내벽 세포에 생기는 종양으로 암은 아니지만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자라는 상태다. 2009년 5차 KCD에서는 이 질병을 ‘경계성 종양’으로 분류했다. 경계성 종양은 악성과 양성의 중간 단계로 많은 암보험에서 보장 대상에 포함된다. 그런데 2021년 8차 개정에서 이 질병이 ‘양성신생물’로 분류가 바뀌었고, 양성신생물은 대부분의 암보험에서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2009년에 암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최근 이 질병으로 진단받았다면 어떻게 될까? 보험회사는 “현재 기준으로는 양성신생물이니 보험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금융감독원의 판단은 달랐다. 보험 가입 당시인 2009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험계약의 기본 원칙과 관련이 있다. 보험은 가입할 때 약속한 조건에 따라 보장하는 것이 원칙이며, 계약 체결 후 외부 기준이 바뀌었다고 해서 약속을 번복할 수는 없다. 특히 해당 보험 약관에 “진단 시점의 KCD를 따른다”라는 별도 조항이 없다면 당연히 가입 시점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금감원의 입장이다.
물론 모든 보험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일부 보험 상품은 약관에 “진단 당시의 KCD 기준을 따른다”라고 명시해 두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안타깝지만 현행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험 가입 시 약관을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일반 소비자는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 첫째, 암보험이나 질병보험 가입 시 약관에서 질병분류 기준을 어떻게 정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KCD를 따른다’라고만 되어 있다면 유리하고, ‘진단 시점의 KCD’라고 명시되어 있다면 불리할 수 있다. 둘째, 본인이 가입한 보험의 시기를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언제 가입했는지에 따라 적용되는 KCD 차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험금 청구를 거절당했을 때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가입 당시 약관과 그 시점의 질병분류 기준을 다시 확인해 보면 정당한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보험회사도 모든 경우를 다 알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험은 어려울 때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리도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입한 보험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기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억울한 일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