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공동체(APEC) 통상장관회의가 지난 22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는 중동전쟁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개최돼 아태지역 국가들의 결속과 협력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된 자리였다.
산업통상자원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한국 정부 수석대표로 회의에 참석해 올해 의장국인 중국, 내년 의장국인 베트남과 함께 APEC 트로이카(전·현·차기 의장국) 자격으로 논의에 참여했다. 한국은 2025년 APEC 의장국을 맡은 경험을 바탕으로 역내 경제협력 논의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먼저 여 본부장은 공급망 위기 극복을 위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위기 상황이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높은 아태지역 국가들에 유가 불안, 석유·가스 수급 차질, 해상물류 비용 상승 등을 초래하며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이에 역내 공동대응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공급망 위기 시 긴급회의 메커니즘과 정보 공유를 강화하는 APEC 차원의 협력 플랫폼 구체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여 본부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전례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예측 가능한 지역주의 진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면서 “개방적 협력(open plurilateralism)을 위한 실용적 접근(pragmatic approach)이 중요하다는 공감대 아래 아태지역에서 APEC이 지속적으로 실용적 협력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과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한국은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DPA), 한-EU 디지털무역협정(DTA) 등 양자·다자 차원의 디지털 규범 형성 노력을 소개했다. 특히 디지털 경제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 확보에 중요한 전자적 전송 무관세(모라토리엄) 관행의 연장이 제14차 WTO 각료회의에서 무산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영구 연장을 지지하는 APEC 회원국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또한 회의 기간 중 열린 디지털동반자협정(DEPA) 통상장관회의에 참석해 지난해 협상이 타결된 페루와 코스타리카의 국내 절차 진행 상황을 점검했으며, 중국의 DEPA 가입 추진 현황도 논의했다.
WTO 등 다자질서 복구 노력도 논의의 핵심이었다. 한국은 제14차 WTO 각료회의에서 개혁세션 조정자(Minister Facilitator)로 참여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끌어냈으나, 전자적 전송 모라토리움과 연계된 일부 국가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에 유감을 표명했다. 여 본부장은 제네바에서 개혁 논의를 계속 진전시켜 나가고, 2027년 제15차 각료회의 전 중간점검 과정에 한국이 적극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투자원활화협정(IFDA)의 WTO 체제 편입은 165개국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1개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여 본부장은 전자상거래 협정(ECA) 임시이행방식을 포함한 조속한 발효·이행을 위한 구체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한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여 본부장은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과 별도 면담을 갖고 개혁 논의의 모멘텀 유지와 전자상거래 모라토리엄 연장, 투자원활화협정 조속 발효 방안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국의 기여 의사를 전달했다.
양자 경제협력 심화를 위한 면담도 잇따랐다. 여 본부장은 올해 의장국인 중국, 내년 의장국인 베트남을 비롯해 미국, 호주, 뉴질랜드, 칠레, 말레이시아 등 10개국 이상의 통상장관 및 대표와 연쇄 면담을 가졌다.
중국 리청강 국제무역협상대표와의 면담에서는 핵심광물을 포함한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협력을 지속하고, 중국의 수출통제 관련 신속·통용 허가 확대를 통한 기업의 예측 가능성 제고를 당부했다. 또한 한중 FTA 서비스·투자 후속 협상 진전을 평가하고 이른 시일 내 한중 FTA 공동위원회(장관급)를 개최해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주요 관심 사항에 대한 협상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미국 릭 스와이처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의 면담에서는 양국 통상현안 전반을 협의했다. 특히 지난해 정상 간 합의한 한미 공동설명자료의 이행 계획을 논의하고, 현재 조사 중인 강제노동 및 과잉생산 관련 미 무역법 301조와 관련해 양국 통상환경 안정화 필요성을 전달했다.
호주 돈 패럴 통상장관과는 LNG·핵심광물·석유제품 등 주요 에너지·자원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 협력을 논의했으며, 뉴질랜드 토드 맥클레이 통상장관과는 DEPA 등 다자통상 채널을 통해 디지털·공급망 분야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칠레 파울라 에스테베스 외교부 국제경제차관과는 리튬 등 핵심광물 협력, 한-칠레 FTA 개선, DEPA 등 다자통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아세안과의 협력 공고화 노력도 눈에 띄었다. 까오 끔 훈 아세안 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 아세안은 한국의 제2위 교역 파트너이자 주요 투자 대상 지역으로서 경제협력의 핵심축임을 평가하고, 디지털 분야 등을 포함한 한-아세안 FTA 개선협상이 조속히 개시될 수 있도록 긴밀히 협의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 조하리 빈 압둘 가니 투자통상산업부 장관과는 지난해 타결된 한-말레이시아 FTA의 서명 및 국내 절차 신속 추진을 통해 양국이 기대하는 효과가 조기 가시화되도록 협력하기로 했다. 베트남 응우옌 신 낫탄 산업무역부 차관과는 지난 4월 국빈 방문 계기로 강화된 협력 모멘텀을 바탕으로 교역액 1,500억 달러 달성 액션플랜을 이행해 양자 교역을 확대하고, 올해 CPTPP 의장국이자 내년 APEC 의장국인 베트남과 다자협력도 지속 확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번 APEC 통상장관회의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 AI·디지털 전환, 다자무역체제 개혁 등 복합적 도전에 직면한 아태지역이 실용적 협력 플랫폼으로서 APEC의 역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은 의장국 경험과 적극적인 중개 역할을 바탕으로 역내 통상 협력의 연속성과 진전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