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들이 중국 쑤저우에 모여 중동전쟁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에서 아태지역의 경제협력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정부 수석대표로 참석해 다자주의 활성화와 디지털·AI·녹색 산업 분야 협력 강화를 강조했다.
한국은 2025년 APEC 의장국으로서 올해 의장국인 중국, 내년 의장국인 베트남과 함께 APEC 트로이카(3개국 협의체) 자격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이는 아태지역 경제협력 논의가 해마다 끊기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여한구 본부장은 모두발언에서 "전례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예측 가능한 지역주의의 진전이 더욱 중요해졌다"며 "개방적 협력을 위한 실용적 접근이 필요하며, APEC이 지속적으로 실용적 협력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위기 상황이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높은 아태지역 국가들에 유가 불안, 석유·가스 수급 차질, 해상물류 비용 상승 등을 초래하며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이에 역내 공동대응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급망 위기 시 긴급회의 메커니즘과 정보 공유 강화 등 APEC 차원의 구체적인 협력 플랫폼 논의를 제안했다.
또한 최근 중동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망 위기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회원국이 에너지 전환의 시급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신재생에너지 확대, 전력망 연계, 탄소크레딧 협력 등 APEC 차원의 협력 방안을 모색해 나갈 것을 촉구했다.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는 디지털 전환과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무역·투자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잠재력을 가졌다고 보고, 한국이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DPA), 한-EU 디지털무역협정(DTA) 등 양자·다자 차원에서 디지털 규범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관행(모라토리엄) 연장이 제14차 WTO 각료회의에서 무산된 데 유감을 표하고, 영구적인 연장을 지지하는 APEC 회원국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여 본부장은 APEC 통상장관회의 계기로 열린 디지털동반자협정(DEPA) 통상장관회의에 참석해 2025년 협상이 타결된 페루와 코스타리카의 국내 절차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중국의 DEPA 가입 추진 현황도 논의했다.
WTO 등 다자질서 복구를 위한 논의도 이뤄졌다. 제14차 WTO 각료회의에서 한국은 개혁세션 조정자(Minister Facilitator)로 참여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끌었으나, 전자적 전송 모라토리움과 연계한 일부 국가들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여 본부장은 제네바에서 개혁 논의를 계속 진전시켜 나갈 것을 촉구하고, 2027년 제15차 각료회의 전에 열릴 중간점검 과정에서 한국이 적극적으로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과 칠레가 공동의장국으로 협상 타결을 주도한 투자원활화협정(IFDA)의 WTO 체제 편입 문제도 논의됐다. 165개국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1개국의 반대로 무산된 데 대해 아쉬움을 표명하며, 전자상거래 협정(ECA)의 임시이행 방식 등 조속한 발효·이행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 본부장은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과 별도 면담을 통해 WTO 개혁 논의의 모멘텀 유지, 전자상거래 모라토리엄 연장 또는 영구화, 투자원활화협정의 조속한 발효 및 이행 방안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고 한국의 기여 의사를 전달했다.
회의 기간 중 여 본부장은 올해 의장국 중국, 내년 의장국 베트남을 비롯해 미국, 중남미·대양주, 신남방 주요국 등 12회( WTO·ASEAN 사무총장 포함)의 양자 면담을 연쇄적으로 갖고 주요 통상현안을 논의했다.
리 청강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협상대표와의 면담에서는 핵심광물을 포함한 공급망 전반의 안정화를 위해 협력을 지속하기로 했다. 중국 측이 시행 중인 수출통제 관련해 신속·통용 허가 확대를 통한 기업의 예측 가능성 제고를 당부했다. 양측은 한중 FTA 서비스·투자 후속 협상의 진전 상황을 평가하고 이른 시일 내 한중 FTA 공동위(장관급)를 개최해 FTA 이행 상황 점검과 주요 관심 사항에 대한 협상을 가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미국 대표로 참석한 릭 스와이처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의 면담에서는 지난해 양국 정상 간 합의한 한미 공동설명자료의 이행계획 등을 논의했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강제노동 및 과잉생산에 대한 미 무역법 301조와 관련해 양국 간 통상환경 안정화 필요성을 전달했다.
중남미·대양주 국가와는 돈 패럴 호주 통상장관과의 면담에서 LNG·핵심광물·석유제품 등 주요 에너지·자원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을 위한 협력을 논의했다. 토드 맥클레이 뉴질랜드 통상장관과는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등 다자통상 협력 채널을 통해 디지털·공급망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파울라 에스테베스 칠레 외교부 국제경제 차관과는 리튬 등 핵심광물 협력, 한-칠레 FTA 개선, DEPA 등 다자통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신남방국가들과의 협력 공고화 노력도 추진됐다. 까오 끔 훈 아세안 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 아세안이 한국의 제2위 교역 파트너이자 주요 투자 대상 지역으로서 경제협력의 핵심 축임을 평가하고, 디지털 분야 등을 포함한 한-아세안 FTA 개선협상이 조속히 개시될 수 있도록 긴밀히 협의하기로 했다. 2025년 기준 한국의 교역액은 중국 2,728억 달러, 아세안 2,047억 달러, 미국 1,963억 달러 순이며, 해외 투자액은 미국 3,371억 달러, 아세안 1,995억 달러, 케이만군도 1,257억 달러, 중국 1,198억 달러 순이다.
말레이시아 다툭 스리 하지 조하리 빈 압둘 가니 투자통상산업부 장관과의 면담에서는 작년 10월 타결된 한-말레이시아 FTA 서명 및 국내 절차를 신속히 추진해 양국이 기대하는 FTA 효과가 조기에 가시화되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베트남 응우옌 신 낫탄 산업무역부 차관과는 지난 4월 국빈 방문을 계기로 강화된 협력 모멘텀을 바탕으로 '교역액 1,500억 달러 달성 액션플랜'을 이행해 양자 교역을 확대하고, 올해 CPTPP 의장국이자 내년 APEC 의장국인 베트남과 다자협력도 지속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이번 APEC 통상장관회의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아태지역 국가들이 다자주의와 실용적 협력을 통해 공동 대응의 틀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은 2025년 의장국으로서 내년도 APEC 정상회의 준비 과정에서도 아태지역 경제협력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구체적 성과를 도출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