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한인사회를 품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재외동포청(청장 김경협)은 2026년 5월 ‘이달의 재외동포’로 故최재형(1860~1920)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을 돌보며 자신의 재산과 삶을 조국 독립에 바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동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은 모습 때문에 연해주 한인들은 그를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ПЕЧКА)’라고 불렀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의 가난한 소작인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 지신허(地新墟) 한인 마을로 이주했는데, 이 마을은 1863년 한인 13가구가 월강해 세운 러시아 최초의 한인 정착촌이다.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선생은 러시아 상선에서 일하며 언어와 국제 감각을 익혔고, 이후 연해주에서 사업을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선생은 사업으로 번 재산을 개인의 부를 위해 쓰지 않고 교육과 한인사회 지원에 아낌없이 사용했다. “배워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니콜라예프스크 소학교를 비롯해 연해주 일대에 32개 소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또한 철도공사 현장에서 통역으로 일하며 강제 동원된 한인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고, 한인사회의 권익 보호에도 힘썼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한 숨은 주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총기를 마련해 주고 사격 연습 장소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을사늑약과 러일전쟁으로 유린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한 선생은 1908년 안중근, 이위종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했고, 함경도 국경 지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는 등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항일 신문인 대동공보 사장, 권업회 설립, 전로한족대표회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에는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들을 학살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당시 최재형 선생은 피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택에 남아 결국 일본군에 체포된 후 우수리스크 언덕에서 장렬히 순국했다. 일본군은 선생의 시신을 암매장했으며, 현재까지도 유해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23년 순국 103년 만에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 뒤편의 흙을 국내로 가져와 아내 최 엘레나 여사와 함께 합장해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김경협 재외동포청장은 “최재형 선생은 자신의 성공과 재산을 동포 사회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나눈 진정한 지도자”라며 “‘가정의 달’인 5월, 연해주 한인들의 따뜻한 난로였던 선생의 삶을 통해 희생과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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