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로 파라메트릭형 시민안전보험은 없을까?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쾌청한 봄날이다. 해 질 녘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를 걷다 보니, 집집마다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이 식구들이 모여 도란도란 저녁을 준비하는 풍경을 상상하게 해 마음이 따스해진다. 우리에게 전기는 이제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공기와 같다.
하지만 지난주 충남의 어느 아파트 지하 배전반 화재로 단지 전체가 일주일 동안 정전되었다는 뉴스는 그 평화로운 불빛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새삼 일깨운다.
지하 전기 화재로 시작된 사고가 아파트 전체의 정전으로 번졌을 때, 주민들이 겪은 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을 것이다.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녹아내린 냉장고의 음식물,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닥친 생존의 위협까지, 일상은 순식간에 마비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 깜깜한 7일간의 고통이 철저한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화재 원인이 관리소의 관리 부실이나 제품 하자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보상받을 길이 막막하다. 개인이 가입한 화재보험은 내 집의 직접적인 피해와 배상책임에 치중할 뿐 이웃의 정전 같은 2차 손해까지 책임지기엔 역부족이며, 아파트 단체 화재보험 역시 공용 시설물의 물리적 파손 보상에 집중되어 있어 주민들이 겪는 유무형의 생활 불편은 보상 리스트에서 제외되기 일쑤다.
결국 원인 미상이나 전기적 요인으로 결론이 날 경우, 관리 주체에게 책임을 묻기 모호해진 주민들의 일상은 법과 계약의 이름으로 방치되고 만다.
이처럼 누구도 명확히 책임지지 못하는 공백을 메울 대안은 없을까. 필자는 그 해답을 ‘파라메트릭(Parametric) 보험’ 형태의 시민안전보험에서 찾고 싶다.
실무에서는 통계적 지표를 기초로 한 ‘지수형(Index-based) 보험’과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파라메트릭 보험은 손해액을 일일이 산정하는 대신 미리 약속된 물리적 변수(Parameter)가 임계치를 넘으면 즉시 보험금을 지급하는 모델이다.
아파트 정전의 경우, 화재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는 대신 ‘정전 지속 시간’이라는 물리적 변수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정전 24시간 초과’라는 매개변수의 수치가 확인되는 순간, 지자체가 가입한 시민안전보험에서 모든 세대에 소정의 긴급 지원금을 즉각 송금하는 식이다. 복잡한 증명 절차를 생략하고 ‘시민의 일상이 멈췄다’는 사실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민안전보험은 자연재해, 폭발, 화재, 상해 등 주로 직접적인 물리적 손해만을 담보한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피한 정전 피해와 같은 ‘일상의 중단’을 담보하는 상품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러한 모델은 ‘에너지 취약계층’에게도 강력한 구원투수가 될 수 있다.
기록적인 폭염이나 한파가 닥칠 때, 냉·난방비가 무서워 전열기조차 켜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온이 35도를 넘었으니 냉방비를 지원해 드립니다”라는 문자 알림과 함께 입금되는 보험금은 그 어떤 정책적 구호보다 실질적인 온기가 될 것이다.
가난과 고통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오직 ‘데이터’라는 공정한 심판관을 통해 존엄하게 지원받는 시스템, 이것이 바로 디지털 기술이 보험에 선사한 축복이다.
이제 보험은 사고 뒤에 나타나 과실을 따지는 수습자가 아니라, 우리 곁을 함께 걷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농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농작물 지수보험부터 소상공인의 임대료를 보전해 주는 재난 보험까지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매개변수나 지수라는 객관적 수치로 손실입증의 수고로움은 덜어내고 회복의 속도는 높이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보험이 가장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온기가 될 때, 우리의 인생 산책로는 비로소 누구나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허연
RMI보험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