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흡의 종횡무진 세계사 1973년, 그리고 2026년 — 오일쇼크의 두 얼굴
2026년 4월 이란을 둘러싼 미국·이스라엘과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이에 반발한 이란은 세계 원유 공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들의 발목을 잡았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 달러를 다시 넘나들고, 코스피는 외국인 매도로 크게 흔들린다. 뉴스 화면 속 풍경은 정확히 50년 전 어느 가을날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1973년 10월 6일 새벽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그날은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Yom Kippur, 대속죄일), 속죄와 성찰을 위해 모든 일상이 멈추는 날이었다. 텔아비브의 이스라엘군 상당수는 휴가 중이었고,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은 수십만 병력과 수천 대의 전차를 앞세워 두 전선에서 동시에 밀려들었다.
전쟁은 불과 19일 만에 막을 내렸다. 군사적으로 보면 짧은 국지전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은 결코 국지적이지 않았다. 이 짧은 충돌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세계 경제 질서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쟁 직후, 아랍 산유국들은 서방 국가들을 겨냥해 원유를 무기로 꺼내 들었다. 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자, 배럴당 3달러이던 유가는 넉 달 만에 네 배 가까이 치솟았다. ‘1차 오일쇼크(Oil shock)’였다. 에너지 수입국들은 순식간에 충격에 빠졌고, 물가는 급등했으며 무역수지는 악화됐다. 세계 경제는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닥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국에 이 충격은 유독 가혹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됐다. 생산비는 오르고 수출 경쟁력은 꺾였다. 이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대에서 24%대로 뛰었고, 외환은행 수표가 국제 시장에서 거절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중동의 포성은 재건의 길을 걷던 한국 경제를 다시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위기 속에서 방향을 바꾼다. 한국은 이 충격을 감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환의 계기로 삼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답은 위기를 만들어낸 바로 그곳, 중동에 있었다. 충격의 진원이 도약의 발판이 된 것이다.
유가 상승으로 막대한 달러를 쌓은 산유국들은 항만과 도로, 산업시설 건설에 나섰고, 한국은 이 흐름에 기술과 노동력을 실어 보냈다. 그 정점이 1976년 6월 체결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Jubail) 산업항 프로젝트였다. 9억3000만 달러, 당시 한국 정부 1년 예산 5분의 1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단순한 공사 수주가 아니라 자본의 물길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산유국에 집중됐던 달러는 한국 건설회사들을 통해 국내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자금은 외환 부족을 메우는 데 그치지 않고 철강·조선·기계 등 중화학공업에 투자됐다. 외화는 설비가 되고, 설비는 생산이 되며, 생산은 다시 수출이 됐다. 건설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외화를 산업 자본으로 바꾸는 장치였다.
주베일은 기술적으로도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바다를 매립해 항만을 만들고, 울산에서 제작한 대형 철 구조물을 바다 위로 실어 나르는 ‘뗏목 작전’이 이때 수행됐다. 이 경험은 훗날 조선과 해양플랜트 기술의 토대가 됐다.
그러나 그 영광의 뒷면에는 섭씨 50도의 사막에서 밤낮없이 일한 노동자들이 있었고, 몇 해씩 가족과 떨어져 지낸 편지들이 있었다. 그들이 송금한 월급은 자녀의 학비가 됐고, 동시에 국가의 외환보유고가 됐다. 자본의 흐름 이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희생과 고통이 있었으니, 역사의 빛 뒤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었다.
주베일의 본질은 공사의 규모나 기술에 있지 않았다. 핵심은 자본의 방향이었다. 산유국에 쌓였던 오일달러가 한국을 거쳐 다시 국내 산업으로 돌아오는 흐름이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그 자금은 포항의 고로, 울산의 조선 도크, 구미의 전자 공단으로 이어졌고, 무역적자는 크게 줄었다.
중동 해외건설은 단순히 무언가를 짓는 산업이 아니었다. 자본이 가장 필요했던 시점에 이를 공급하고 증폭시킨, 그 자체로 하나의 금융 장치였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경제는 위기를 넘어 성장의 궤도에 올라섰다.
5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다시 중동발 파고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한국은 더 이상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 10위권의 산업 강국이자 반도체·배터리·조선·자동차를 아우르는 복합 수출국가다. 중동 역시 더 이상 건설 노동력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스마트시티를 짓고, 수소 경제를 설계하며, 인공지능과 문화콘텐츠의 파트너를 찾고 있다.
이번 파고가 또 다른 기회가 될지, 또 다른 시험대가 될지는 아직 열려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위기의 본질은 충격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흐름으로 전환시킬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1973년의 한국이 오일달러의 물길을 국내로 되돌렸듯, 2026년의 한국도 자신만의 물길을 찾아야 한다.
짧은 전쟁이 긴 경제를 바꾸었다. 중동의 포성은 멈췄지만, 그때 움직이기 시작한 자본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그 흐름 속에서 한국은 위기의 피해자를 넘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는 주체로 자리 잡았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처럼 닮은 장면을 되돌려준다. 1973년의 교훈이 2026년의 답이 될 수 있을지는,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