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의 60+Life story] 퇴직 후 통장을 지키는 최고의 브레이크는 ‘절약’이 아닌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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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30분, 정적을 깨는 알람이 집안을 울린다. 소리는 침대 머리맡 스마트폰과 거실 책장 위 탁상시계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는 이중 장치다. 퇴직한 지 4년이 지났는데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이 ‘귀찮은 의식’은 내 삶의 기준값이 됐다. 침대를 벗어나 책장까지 걸어가야만 소음이 멈춘다. 단순한 기상 신호가 아니라, 하루의 질서를 세우는 출격 선언에 가깝다. 강의 일정이 있는 날의 알람은 설레는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일정이 비어 있는 날이다. 알람을 끄고 거실 한복판에 혼자 서는 순간, 오늘 하루 마주해야 할 ‘시간의 공백’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 공백은 휴식이 아니다. 사회적 역할에서 잠시 밀려난 듯한 불안이 따라온다. 그리고 그 불안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출’로 번진다. 퇴직하면 출퇴근비나 점심값이 줄어 여유가 생기지 않느냐는 말을 종종 듣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다. 매달 들어오는 돈줄이 불규칙한데, 차비 몇 푼과 밥값 몇 끼를 아낀다고 형편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 더 무서운 건 강의가 없는 날에 생기는 ‘보이지 않는 지출’이다. 텅 빈 시간표를 어떻게든 채우려다 생기는 비용, 다시 말해 갈 곳 없는 시간을 대신하는 ‘매몰 비용’이 은근히 통장을 갉아먹는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향한다. 강의안을 다듬거나 글을 쓰는 게 목적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거실의 정적을 피하려는 마음도 크다. 누군가는 이를 여유로운 중년의 풍경이라 보겠지만, 내게 카페는 고립을 덜기 위해 지불하는 ‘임시 울타리’다. 자리를 잡는 순간 커피값이라는 ‘시간 입장료’가 따라붙는다. 커피 한 잔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다. 아직은 사회의 흐름 안에 있다는 안도감을 사는 최소 비용이다. 이 지출의 바닥에는 퇴직자의 심리가 있다. 역할이 옅어진 자리를 뭔가 ‘생산적인 행위’로 메우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허공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건 개인의 의지력이나 절제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퇴직자를 숙련된 경험자로 대우하기보다,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로 대하는 쪽에 더 익숙하다. 백화점과 쇼핑몰은 친절하고 화려하지만, 퇴직자가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나눌 공적 통로는 의외로 좁다. 일은 사라지고 소비만 권장되는 구조에서, 빈 시간을 떠안은 사람의 통장은 속수무책으로 마르기 쉽다. 디지털 문턱이 높아질수록 이 고립은 더 깊어진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라지만, 정작 그 안에서 퇴직자가 ‘기여할 자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갈 곳 없는 퇴직자들은 카페와 도심의 소비 공간으로 밀려난다. 역할이 사라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존감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다. 그 비용은 커피 한 잔에서 시작해, 외식과 쇼핑, 의미 없는 이동으로 확장된다. 퇴직 후 돈을 아끼는 진짜 비결은 가계부 숫자를 깎는 데 있지 않다. 갈 곳 없는 내 몸을 가치 있게 써먹을 ‘오늘의 할 일’을 만드는 데 있다. 돈은 단순히 안 쓴다고 모이지 않는다. 돈 쓸 시간을 잊을 만큼 무엇인가에 몰입해 있을 때, 비로소 돈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현명한 퇴직자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일과표를 점검해야 한다. 오늘 주어진 일이 있든 없든, 내가 오늘 하루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것인가가 선명할수록 소비의 유혹은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퇴직 후 줄어드는 잔고를 붙잡는 최고의 브레이크는 절약이 아니라 일과다. 무엇을 살지 말지를 고민하기보다, 오늘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 그게 퇴직 이후 지출의 역설을 깨는 가장 현실적인 재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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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보험신문 ✓ 협약 승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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