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의 눈 탈모약 건보 적용, ‘기준’이 필요하다
정책은 언어를 통해 방향을 드러낸다. 특히 제도와 재정이 맞물린 사안일수록 한 단어, 한 문장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최고 정책 결정권자의 발언은 그 자체로 논의의 출발점이 되며, 때로는 제도 검토에 앞서 정책 신호로 해석되기 때문에 정책 언어에는 언제나 신중함이 요구된다.
지난 16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탈모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후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탈모 치료는 생명과 직결된 의료 영역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취지로 선을 그었지만, 논의의 불씨는 이미 지펴진 뒤였다. 건강보험은 국민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재정이다. 사회적 논의와 제도 검토가 충분히 이뤄지기 전에 최고 정책 결정권자의 방향성을 띤 발언이 먼저 나오는 방식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탈모 문제를 단순한 미용 이슈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점에는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탈모가 정신적 스트레스와 사회적 위축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기자 주변에서도 탈모 스트레스로 인해 약물 치료나 병원 진료를 병행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제한적인 조건 아래 탈모 치료를 의료 영역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다만 건강보험 급여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공감의 크기가 아니라 정책의 적합성이다.
건강보험 제도는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거나 신체 기능 손상이 발생하는 질환을 우선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출발했다. 치료를 통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일상생활 수행 능력의 회복이 기대되는 경우를 중심으로 급여 기준이 설정돼 왔다. 모든 질환이 아닌 중증·필수 의료 영역에 재원을 집중하는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보험 체계는 최근 재정적 압박에 직면해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고령화로 인한 지출 증가로 건강보험 재정은 2026년 당기수지 적자로 전환되고, 2030~2031년에는 적립금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정부는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이유로 약제 급여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고가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조차 비용 대비 효과성 문제로 급여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암이나 희귀질환처럼 생명과 직결된 영역에서도 재정 부담을 이유로 건강보험 적용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장기 복용이 전제되는 탈모 치료제를 급여 대상으로 검토하는 것이 정책적으로 일관된 선택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탈모 치료제는 의료적 필요성과 미용적 목적이 혼재된 대표적인 경계 영역이다. 장기간 처방이 불가피한 특성상 급여 적용이 이뤄질 경우 처방량 증가와 재정 지출 확대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이는 정부가 그간 강조해 온 건강보험 재정 관리 기조와도 충돌할 소지가 있다.
급여 기준을 설정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다. 현재 탈모 치료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어, 이를 급여 체계 안으로 편입할 경우 적용 범위와 기준을 둘러싼 논쟁은 불가피하다. 한정된 재원 속에서 어디까지를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찬반 논리로 정리되기 어렵고, 논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일시적 급여 적용에 그친다면 체감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평생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정책 효과 역시 제한적일 수 있다는 의미다. 탈모 치료제 급여 적용 논의는 건강보험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제한된 재원을 어떤 질환에 우선 배분할 것인지, 제도의 본래 목적과 형평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없다면 앞으로도 건강보험 적용과 관련된 혼란은 또다시 나올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능성의 언어가 아니라 기준의 언어다. 제도의 신뢰는 일관된 기준에서 나온다. 정부는 기준 없이 던져진 발언 하나로 건강보험 제도의 우선순위와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