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흡의 종횡무진 세계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만든 두 인물

송영흡의 종횡무진 세계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만든 두 인물
19세기 중반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아시아의 강국이자 자존심이던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패하자, 일본은 세계 질서가 순식간에 뒤바뀌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됐다.
“청나라조차 저렇게 무너진다면, 일본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이런 두려움은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이 에도만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현실로 다가왔고, 결국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서 개항을 받아들이고 불평등 조약을 연달아 체결하며 사실상 반식민지적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한 것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Meiji Restoration)이었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중국 고전 ‘서경(書經)’에서 유래한 것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고 근본을 새롭게 세운다는 뜻을 지닌다. 이는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틀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혁명적 변화를 가리킨다.
외교적 무능, 노후한 군사력, 파탄에 이른 재정, 곳곳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등 복합 위기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막부 체제는 더 이상 일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시대적 압력 속에서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가 되었고, 결국 메이지 유신은 수백 년 이어진 막부 체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신속히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써 일본은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출발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이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사실이다. 국민의 의식을 깨우고 근대적 시민의 기초를 마련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Fukuzawa Yukichi), 국가 운영체제를 설계하며 근대 국가의 틀을 세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Ito Hirobumi) 그리고 두 흐름을 하나로 묶어 국가적 전환을 이끌어낸 메이지 천황이 그 핵심이었다.
한 사람은 ‘근대적 국민’을, 다른 한 사람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었고, 천황은 이 변화의 구심점이 됐다. 이 세 인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역할을 발휘했기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식 근대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네덜란드학을 공부하며 서양 문물을 접했다. 1860년 미국 사절단으로, 1862년에는 유럽 시찰로 세계 문명의 실제 모습을 경험했다. 귀국 후 그는 ‘서양사정(西洋事情)’ 등 다양한 저술을 통해 서구의 제도와 사회 구조를 소개하며 일본 사회를 깨웠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그의 선언은 신분제와 봉건 질서를 뒤흔드는 사상적 전환점이 됐으며, 그가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 Keio Gijuku)은 일본 최초의 근대 사립학교로 새로운 시민 계층 형성의 중심이 됐다. 후쿠자와는 일본인의 정신을 근대적 사고체계로 바꾸어 놓은 ‘국민 소프트웨어의 개혁자’였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Yoshida Shoin)의 문하에서 정치를 배웠고, 1863년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국가 운영의 실체를 직접 확인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 그는 내무·재정·통신·산업 등 국가 근대화의 핵심 실무를 맡으며 행정체계를 정비했다. 1881년 헌법 제정 책임자로 임명된 이토는 유럽의 헌정 체계를 조사해 1889년 메이지 헌법을 완성했고, 내각제·추밀원·제국의회 등 근대적 국가 시스템을 구축했다. 비록 이후 제국주의적 팽창에 깊이 연루되며 역사적 책임을 남겼지만, 일본 국가의 ‘하드웨어’를 설계한 핵심 인물이었다.
후쿠자와와 이토는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후쿠자와가 국민의 사고방식과 시민성을 변화시켜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다면, 이토는 제도와 권력을 재구성해 근대 국가의 틀을 완성했다. 한 사람은 국가의 정신을, 다른 한 사람은 국가의 구조를 바꾸었다. 두 혁신이 동시에 작동했기에 일본은 짧은 시간 안에 사상적·제도적 변혁을 이루며 근대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분열, 경제 성장 둔화가 겹쳐지며 구조적 위기와 정서적 무기력을 동시에 겪고 있다. 교육은 입시 중심의 체제에 묶여 미래 역량을 키우지 못하고, 국정 운영 또한 단기 이해관계에 흔들리는 일이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중반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이 맞닥뜨렸던 정체와 혼란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메이지 유신은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국가 운영체제를 근본부터 다시 설계한 ‘문명적 전환’이었다. 정치·군사·행정·재정·교육·시민 의식까지 모두 재편한 이 과정은 국가 단위의 ‘리스크 리빌드(Risk Rebuild)’이자, 미래를 새롭게 디자인한 프로젝트였다. 세계사는 늘 묻는다.
“국가는 위험을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재설계하는가?”
오늘의 한국도 디지털 전환, 지정학적 불확실성, 사회적 분열이라는 복합적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제도만 고치거나 사람만 바꾸는 방식으로는 거대한 전환을 감당할 수 없다. 국가 시스템과 국민 의식이 함께 재정렬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미래가 열린다는 것—이것이 메이지 유신이 남긴 본질적 교훈이며, 우리가 지금 세계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