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년 전 외국인 선교사가 쓴 조선 기행 편지가 복원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제54주년 보건의 날(4월 7일)을 맞아 양화진기록관이 소장한 '로제타 셔우드 홀의 두루마리 기행편지'를 전면 복원했다고 밝혔다.
이 편지의 주인공 로제타 셔우드 홀은 한국 현대 의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국내 최초 여의사 교육기관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고, 국내 최초 한글 점자 교재를 제작했다. 1890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그는 평양에서 기홀병원과 광혜여원, 맹아학교 등을 세우며 의료와 교육 발전에 헌신했다.
기행 편지는 로제타가 1890년 9월 미국을 떠나 조선에 도착한 직후인 1891년 1월까지의 활동을 가족에게 전하기 위해 쓴 것이다. 정갈한 영문 필기체로 낱장 편지 94매를 이어 붙여 만든 이 두루마리는 가로 16.4cm, 세로 길이가 무려 31.8m에 달한다. 총 2건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기록물에는 1890년 9월 4일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증기선을 타고 호놀룰루와 일본을 거쳐 10월 14일 조선에 도착하기까지 40일간의 태평양 횡단 여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조선 도착 후 3개월간의 기록은 더욱 특별하다. 136년 전 외국인 선교사의 시선으로 본 당시 척박했던 의료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특히 전통 한옥 진료소인 보구녀관의 모습, 가마와 전통 혼례, 고종이 청나라 사절단을 맞이하는 행렬 등 로제타가 직접 촬영한 희귀 사진 59점이 함께 부착돼 있어 당시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편지 내용 중 일부를 보면 로제타는 "진료소에서 첫날 본 환자는 4명이었고, 다음 날은 9명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3개월 동안 270명의 초진 환자와 279명의 재진 환자를 포함해 총 549건을 치료했다"고 적었다. 또한 고종이 청나라 사절을 맞이하는 장면에 대해 "소총과 총검을 든 군인들, 깃발, 천막, 거친 악기들, 다양한 의상들이 어우러져 매우 인상적인 광경을 만들었다"고 생생히 전했다.
이 희귀 기록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부착된 비닐테이프가 변색되고 접착제가 경화됐으며, 당시 필기 매체인 아이언 겔 잉크의 부식으로 글자 부분이 갈색으로 변하고 종이가 바스러졌다. 아이언 겔 잉크는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사용된 대표적 필기용 잉크로, 철과 탄닌 성분이 산화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글씨 부분이 부식되고 종이가 떨어져 나가는 특징이 있다. 또한 기록물이 지름 0.3cm의 작은 나무축에 32m 길이로 말려 있어 꺾임과 접힘 등으로 활용이 어려운 상태였다.
국가기록원은 약 18개월에 걸쳐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탈락된 글씨 부분을 복원용 한지로 보강해 안정성과 보존성을 높였다. 두루마리 형태의 물리적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원본 크기에 맞는 굵게말이축을 사용해 말림 횟수를 최소화했고,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해 복원을 완료했다. 굵게말이축은 전통 회화의 족자나 두루마리 보관 시 주름과 꺾임을 방지하는 보조 도구다. 아울러 이후 열람과 연구, 전시 등에 활용할 복제본 제작을 위해 고해상도 스캐너로 디지털화도 진행했다.
복원된 기행 편지의 원문은 소장처인 양화진기록관 누리집과 국가기록원 누리집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국가기록원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국가기록물의 보존 수명을 연장하고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2008년부터 맞춤형 복원·복제 지원 서비스를 운영 중이며, 현재까지 81개 민간·공공기관의 기록물 9,272매를 복원했다.
강요섭 양화진기록관장은 "우리나라 근대 의료와 교육의 초석을 놓은 로제타 홀 선교사의 기록물이 국가기록원의 도움으로 다시 숨을 쉬게 돼 깊이 감사드린다"며 "선교 역사와 근대사를 연구하는 소중한 기록유산으로 널리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용철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복원으로 보건 의료 종사자를 기리기 위한 보건의 날에 국민들에게 공개되고 연구 등에 활용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다"며 "앞으로도 우수한 복원 기술로 소중한 기록유산들이 안전하게 영구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